무영탑 - 163

나는 범보다 더 날래게 불길 속에 뛰어들어 주만을 구해 낸 이는 경신이었다.
오늘도 검술과 궁술 겨룸에 보기 좋게 장원을 하여 만사람의 칭찬을 받았으되, 이 영광에 싸인 자기를 보고 누구보다도 더 기뻐할 이손 유종의 얼굴이 보이지 않는 것이 섭섭하고 궁금하였다.
어쩐지 마음에 키이어, 여러 낭도들의 폭풍우 같은 환호와 찬사도 받는 둥 마는 둥 슬그머니 빠져나와 주만의 집으로 말을 채쳐 오는 길에 햇님다리 가에 사람이 백절치듯 모인 것을 보았다. 무슨 까닭인가를 물어 보니, 이손 유종이 제 실행한 딸을 태워 죽이는 것이란 말을 듣고 쏜살같이 뛰어든 것이었다.
이손의 불 같은 성미에 일이 탄로만 되면 이런 거조가 있으리라고 그는 어렴풋이나마 미리 짐작도 하였다.
그리고 어젯밤에 얼른 본 주만의 얼굴에 수심이 가득한 양이 한량없이 애처로웠다. 그 다소곳한 머리와 수줍은 눈길에 풀기 하나 없는 것이 한량없이 가엾었다. 암만해도 무슨 악착한 사단이 벌어질 것만 같아서 가슴이 섬뜩하였다.
한두 번밖에 대해 보지 않았으나 그 뛰어나게 아름다운 용모와 씩씩한 기상과 대담한 태도가 경신에게는 엄청난 경이었다. 눈부신 존재였다. 벌써 마음을 바친 데가 있는 그이거니 제 아내가 되기는 사내답게 단념할 수밖에 없었지만, 한번 가슴속 깊이 박힌 그 안타까운 그림자는 좀처럼 가시어지지 않았다. 부모님께도 사뢰지 못한 그 괴로운 속을 처음 만나는 자기를 턱 믿고 숨김없이 하소연한 것이 어떻게 정다운지 몰랐다. 더구나 자기와 청혼된 남자가 낙명이 될까 염려하여 신랑 쪽에서 파혼까지 해달라고 하는 그 마음씨는 곰살궂고도 여무지었다.
세상에도 희귀하고 열렬하고 비장한 주만의 사랑이 올곧게 열매를 맺기를 경신은 진정으로 축수하였건만, 마치 친누이동생과 같은 깨끗하고 애연한 정을 느끼었던 것이다.
이러한 주만이 생목숨을 끊게 되었거늘, 어찌 제 몸의 위험을 살필 수 있느냐. 제 체모를 돌아볼 수 있느냐.
경신은 들숨날숨없이 복잡한 서울거리를 헤어 나와 개운포 한길로 달리었다. 서울이 아득하게 멀어지고 인가가 없는 들판에 나온 뒤에야 경신은 턱에 닿은 숨을 돌리었다.
뒤를 돌아보아도 쫓아오는 사람은 없는 듯.
얼떨떨한 정신을 수습하자 첫째 머리에 떠오르기는 제 등에 업힌 주만이 어찌 되었나 하는 염려였다.
팔과 고개가 제 어깨에 척 늘어져 힘없이 흔들흔들하는 것을 보면 그대로 혼절된 모양이었으나, 촉촉하고 따스한 온기가 주만의 가슴 언저리로부터 제 등에 배어 스며드는 것을 보면 아직 숨기는 남아 있는 듯하였다.
"어디든지 치우고 들어야 할 텐데."
경신은 혼자 속살거리고 또다시 말을 채쳐 자기가 서울 오름내림 길에 드는 주막을 찾아들었다.
조용한 방 하나를 치우고 주만을 들여다 눕히었다.
옷자락이 군데군데 타서 떨어져 너불너불하는 대로 흰 살이 드러난 것도 가엾거니와 뺨 언저리엔 덴 자국이 밀룽밀룽 부풀어오르고 그 좋은 머리도 그슬러져서 오글오글해진 모양이 참혹하였다.
"애구 가엾어라, 불난 집에서 뛰어나오셨군. 저렇게 기색을 하셨으니 냉수나 좀 떠넣어 보시지. 그러고 데인 자리엔 간수나 발라 보시지. 에구 끔찍해라, 많이도 다치셨네. 그래도 숨이 붙으신 게 천행이시군."
혼동된 주인 노파는 방에 따라 들어와 이부자리를 깔고 나서 제 아는 대로 구호방법을 가르쳐 주었다.
경신은 노파와 같이 주만의 꽈리같이 부르튼 입술을 벌리고 냉수를 몇 숟갈 떠넣어 보았으나, 물은 넘어가지 않고 그대로 흘러나왔다.
"다치신 것도 다치신 거지만 워낙 놀라셨을 테니 잠깐만 진정을 하시도록 하시지."
하고 노파는 나가 버렸다.
떡 한 시루 쪄낼 동안이나 지냈으리라.
주만은 무엇을 찾는 듯이 손을 내저었다.
경신은 놀란 듯이 옆으로 다가들며 부르짖었다.
"구슬아기님, 구슬아기님."
주만의 입술은 달싹달싹하였다. 분명히 무슨 말을 하는 모양이나 모기 소리보다도 더 가늘어서 알아들을 수가 없었다.
"구슬아기님, 구슬아기님, 무슨 말씀이요, 무슨 말."
주만은 얼굴을 찡그리며 짜증을 내었다.
"아이, 아사달님, 아이 아사달님은 그래도 못 알아들으셔요."
경신은 아사달이란 낱말은 분명히 알아들을 수 있었다. 그로 말미암아 아까운 청춘을 불 속에 장사할 뻔하고, 숨이 붙은 둥 만 둥한 이 생사관두에 헛소리로도 제 사랑의 이름을 찾는 걸 보고, 경신은 그 지긋지긋한 사랑에 진저리를 치면서도 새삼스럽게 고개가 숙여졌다.
"그, 그 돌에 내, 내 얼굴을 새, 새겨 주셔요. 녜, 아사달님이 이 손에 그 돌을 만져 보여 주셔요. 어디 나, 나를 닮았나, 안 닮았나 더듬어 보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