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사달은 넋잃은 사람 모양으로 주만의 돌아서 가는 양을 멀거니 바라보다가 손버릇같이 다시 정을 들기는 들었다. 그러나 어느결엔지 아사녀의 환영은 깜박 사라져 버렸다. 아까까지는 어렴풋이라도 짐작되던 그 흔적마저 놓치고 말았다.
아무리 눈을 닦고 돌 얼굴을 들여다보았으나 눈매까지는 그럴싸하게 드러났지마는 그 아래로는 캄캄한 밤빛이 쌓인 듯 아득할 뿐.
돌을 들여다보면 볼수록 골머리만 부질없이 힝힝 내어둘리었다.
그러자 문득 그 돌 얼굴이 굼실 움직이는 듯하며 주만의 얼굴이 부시도록 선명하게 살아났다. 마치 어젯밤의 아사녀의 환영 모양으로.
그 눈동자는 띠룩띠룩 애원하듯 원망하듯 자기를 쳐다보는 것 같다.
"이 돌에 나를 새겨 주세요. 녜, 아사달님, 녜, 마지막 청을 들어주세요."
그 입술은 달싹달싹 속살거리는 것 같다.
아사달은 정을 쥔 채로 머리를 털고 눈을 감았다.
돌 위에 나타난 주만의 모양은 그의 감은 눈시울 속으로 기어들어오고야 말았다. 이 몇 달 동안 그와 지내던 가지가지 정경이 그림등 모양으로 어른어른 지나간다.
파일 탑돌이할 때 맨 처음으로 마주치던 광경, 기절했다가 정신이 돌아날 제 코에 풍기던 야릇한 향기, 우뢰가 울고 악수가 쏟아질 적 불꽃을 날리는 듯한 그 뜨거운 입김, 들…….
아사달은 고개를 또 한번 흔들었다. 그제야 저 멀리 돈짝만한 아사녀의 초라한 자태가 아른거린다. 주만의 모양을 구름을 헤치고 둥둥 떠오르는 햇발과 같다 하면, 아사녀는 샐 녘의 하늘에 반짝이는 별만한 광채밖에 없었다.
물동이를 이고 치마꼬리에 그 발간 손을 씻으며 바시시 웃는 모양, 이별하던 날 밤 그린 듯이 도사리고 남편을 기다리던 앉음 앉음, 일부러 자는 척하던 그 가늘게 떨던 눈시울, 버드나무 그늘에서 숨기던 눈물, 들…….
아사달의 머리는 점점 어지러워졌다.
아사녀와 주만의 환영도 흔들린다.
휘술레를 돌리듯 핑핑 돌다가 소용돌이치는 물결 속에서 쪼각쪼각 부서지는 달그림자가 이내 한데로 합하듯이, 두 환영은 마침내 하나로 어우러지고 말았다.
아사달의 캄캄하던 머릿속도 갑자기 환하게 밝아졌다.
하나로 녹아들어 버린 아사녀와 주만의 두 얼굴은 다시금 거룩한 부처님의 모양으로 변하였다.
아사달은 눈을 번쩍 떴다.
설레던 가슴이 가을물같이 맑아지자, 그 돌 얼굴은 세 번째 제 원불(願佛)로 변하였다.
선도산으로 뉘엿뉘엿 기우는 햇발이 그 부드럽고 찬란한 광선을 던질 제 못물은 수멸수멸 금빛 춤을 추는데 흥에 겨운 마치와 정 소리가 자지러지게 일어나 저녁 나절의 고요한 못둑을 울리었다.
새벽만하여 한가위 밝은 달이 홀로 정 자리가 새로운 돌부처를 비칠 제 정 소리가 그치자 은물결이 잠깐 헤쳐지고 풍 하는 소리가 부근의 적막을 한순간 깨트렸다.
출전:동아일보(1938.7.21~1939.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