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왕지사, 일은 틀린 일, 지금 달아난다 한들 무슨 소용이 있겠느냐."
주만은 길게 탄식하였다.
"뗳시오. 지금이라도 늦지 않습니다. 아가씨만 이 자리에 없으시다면 하인배들이 굳이굳이 찾으려 들지도 않을 것 아닙시오."
"내 혼자 달아나서 이 구구한 목숨을 보전하면 무엇 하랴."
"아사달 서방님이 저기 계시지 않습시오."
"그 어른은 또 큰일을 시작하셨단다. 한번 일을 손에만 대시면 침식도 잊으시고 생사도 모르는 이. 몇 번 길 떠나기를 재촉도 해보았지만 들은 척도 않으시니 어쩌는 수가 있느냐."
"어규, 이를 어째, 이를 어째."
털이는 펄쩍 뛰었다.
저편 길 쪽이 떠들썩하는 곳을 바라보매 과연 껌정 벙거지를 둘러쓴 구종들이 벌떼같이 이리를 향하고 달려온다.
"애구 아가씨, 저것들을 보십시오, 보십시오."
하고 털이는 주만의 손목을 이끌며 달아나려 한다.
주만은 손목을 뿌리치며,
"지금 와서 허둥거리면 하인배 소시에 창피만 할 뿐."
하고 주만은 잠깐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더니 털이를 보고,
"너는 여기 있어 저 사람들이 들어닥치거든 잠깐만 기다려 달라고 일러라. 내 아사달님께 마지막 부탁할 것이 있다."
주만은 아사달의 곁으로 왔다.
아사달은 비 오는 듯하던 땀을 씻으려 하지도 않고 돌을 새기기에 일단 정성을 모으고 있었다.
자기를 그리고 그리다가 자기를 찾아와서 죽은 아내의 모양을 그는 하늘이 무너져도 제 손으로 다시 살리려고 제 재주와 힘을 다 들이고 있었던 것이다.
"아사달님, 아사달님!"
주만은 비통한 목소리로 부르짖었다.
"나는 가요, 나는 인제 잡혀 가요. 이것이 이 세상에서는 아사달님과 마지막 작별, 한 번만 그 얼굴을 이쪽으로 돌리셔요, 단 한 번만 눈 한 번 깜짝일 짧은 동안이나마……."
아사달의 손길은 와들와들 떠는 듯하였다. 정은 돌 위에서 허청을 치고 미끄러진다.
"네, 아사달님, 얼른 얼굴을 돌리셔요, 다시 한번 자세히 뵈옵게. 이 가슴속 깊이 새겨 두게. 뜨거운 불길이 이 몸에 붙을 제도 그리운 그 얼굴을 눈앞에 그리면서 숨이 잦아지게, 그러고 또 마지막 부탁이 있어요."
아사달은 얼굴을 들었다. 정소리도 끊어졌다.
"아이 고마워라, 아이 고마워라, 아사달님이 나를 보시네."
주만은 감격에 겨운 듯이 속살거리고 물끄러미 아사달 얼굴의 이모저모를 샅샅이 알알이 뜯어보았다.
거의 넋을 잃은 듯이 흥껏 아사달의 얼굴을 들여다보고 나서,
"아사달님, 아사달님, 이만하면 아사달님 얼굴은 자세히 뵈었어요. 내 얼굴도 자세히 보아 주셔요. 그러고 내 얼굴을 그 돌 위에 새겨 주셔요. 이것이 나의 마지막 부탁, 네 아사달님, 들어주실 테지요."
"……"
"왜 대답이 없으셔요. 왜 금세로 얼굴빛이 파랗게 질리셔요. 왜 뺨 언저리가 실룩실룩 떠십니까. 마지막 이별에 마지막 부탁, 설마 아니 들어주실 리야 없겠지요. 이 몸, 이 모양이 아사달님의 손으로 그 돌 위에 새겨만 진다면, 다시 살아만 있다면 나는 죽어도 여한이 없어요. 이 하잘것없는 몸은 푸른 연기가 된다 해도 이 돌 위에 새겨진 내 얼굴은 몇백 년 몇천 년을 살아남을 것 아녜요. 우리의 비참한 사랑의 기념으로 돌 하나를 남긴다 한들 죄 될 것이 없겠지요. 네, 아사달님, 이 청이야 들어주실 테지요."
주만의 입길에서는 단김이 서려 흘렀다.
못 물결도 출렁거리기를 그치고 일순간 얼어붙은 듯이 고요하다.
"왜 대답이 없으시오. 선선히 그리하마 일러주지 않으시오. 그 돌에 새기는 건 부처님의 상이에요, 보살님의 상이에요. 무슨 원불(願佛)을 새기시느니보담 이 주만을 새겨 주셔요. 네, 아사달님."
왁자지껄하는 소리가 점점 가까워 온다.
털이가 가로막고 서서 기다리라고 타이르는 모양이었다.
주만은 몸을 일으켰다.
"자, 아사달님, 나는 가요, 마지막으로 가요. 부명이 지엄하시니 오래 머뭇거리고 있을 수 없어요. 제발 내 마지막 소원을 풀어 주세요. 네, 아사달님. 그러면 부디 안녕히."
주만은 조용조용히 걸어나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