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60

'구슬아기가 내 옆에 있구나.'
하는 생각이 분명히 들자, 아사달의 정질은 갈수록 제자리에 놓이지 않고, 눈앞에 그리는 아사녀의 눈매조차 아리숭아리숭 여불없이 붙들리지 않았다.
그의 열에 뜬 머리조차, 주만의 뼈에 사무치는 원정으로, 찬물을 끼얹는 듯 식어 갔다.
그는 이 쨍쨍한 현실에 한순간 손길이 빗나가고 말았다.
아뿔싸! 그는 다시 돌 위로 눈을 돌렸건만, 그렇게도 생생하던 아내의 환영은 하잘것없이 흐려진다. 봄볕에 눈처럼 스러지고, 저녁놀 사라지듯 흐지부지 가무러지려 한다. 그 대신 초죽음 다 된 해쓱한 주만의 얼굴과 그 파랗게 질린 입술이 실룩실룩 떨고 있다.
아사달은 아물아물해 가는 아사녀의 모습을 불러일으키려고 바작바작 애를 켜며 질팡갈팡 정과 마치를 휘둘렀다.
아사녀가 죽은 줄이야 꿈에도 모르는 주만이로되, 아사달의 침통한 얼굴과 애절한 눈초리와 서두는 태도로 보아, 이 공사도 아사달에게는 다보탑과 석가탑보다 못하지 않은 것임을 깨달을 수 있었다. 아무리 조른다 해도 자리를 뜰 것 같지도 않았다. 아무리 기막힌 제 처지를 호소한다 해도 이미 도취의 경지에 들어간 아사달의 마음을 돌릴 것 같지도 않았다. 그의 일만 더 늦어지게 할 뿐이 아닌가.
주만의 속은 조비비는 듯하였지만 아사달의 손떼기를 기다리는 수밖에 없었다.
멀거니 정질의 자취를 더듬어 보매, 아사달은 사람의 얼굴을 새기느라고 애를 쓰는 것을 알 수 있었다.
아침때가 겨웠다.
한낮이 되었다.
아사달의 손은 좀처럼 쉬어지지 않았다.
주만이가 제 등뒤에 멀지 않게 말굽 소리를 들은 듯싶은 순간,
"아가씨, 아가씨, 구슬아가씨."
가쁘게 부르는 털이의 소리가 들려 왔다.
주만이 고개를 돌려 보니 과연 털이가 죽을 상을 하고 말을 채쳐 오는 꼴이 보이었다.
'무슨 일이 생겼구나.'
하고 주만의 가슴은 덜컥 내려앉았다.
주만이 마주 나오자 털이는 말에서 내려 종종걸음을 쳤다.
"아가씨, 아가씨, 큰일났는뎁시오. 왜 여기 이러고 곕시오. 쇤네는 벌써벌써 멀리멀리 가신 줄 알고 허허실수로 불국사엘 들렀더니, 차돌의 말이 여기 계시다기로 이리로 오는 길입지요."
털이는 이마에 괸 진땀을 손으로 씻으며 그 동그란 눈을 더욱 호동그랗게 뜬다.
"무슨 일이 생겼느냐."
주만은 오히려 태연히 물었다.
"이거, 이거, 참 큰일났는뎁시오. 여기 이러고 계시다니, 쇤네 뒤에는 곧 하인배들이 쫓아올 텐뎁시오. 왜 달아나지를 않으십시오. 녜, 녜, 아가씨 지금이라도 어서어서 달아를 나십시오."
"다 틀렸다. 어찌 된 곡절이나 들려 다오."
주만은 이미 단념하고 절망한 지 오래였다. 하필 이 아슬아슬한 판에 아사달이 그 돌을 새기기 시작한 것은 이미 저의 악착한 운명이 작정된 줄 알았던 것이다.
"오늘이 한가위, 신궁 앞에 검술과 궁술의 큰 모임이 열리고, 경신 서방님이 활쏘기와 칼겨룸을 하시는데 거기 구경을 가시자고 대감께서 아가씨를 찾으신 모양입시오. 마님께서 숨기다가 못해서 마침내 바른 대로 여쭈신 모양입시오. 대감께서 발을 구르시고 역정을 하늘같이 내시어, 그런 년은 당장 잡아서 불에 태워 국법을 바루신다고 야단야단을 치시는 걸 쇤네도 밖에서 들었는뎁시오. 마님께서 밖으로 나오시더니 저를 넌지시 부르시어 너 빨리 불국사엘 가서 아가씨가 계신가 안 계신가만 보고 만일 계시거든 빨리 달아나게 하라고 이르셨는데, 아가씨는 여기 이러고 계시니 이 일을 장차 어떡해요, 어떡해요."
하고 털이는 입을 삐죽삐죽하며 눈물이 듣거니 맺거니 한다.
주만은 어머니의 자정에 가슴이 찌르르해지도록 새삼스럽게 감동하였다. 버린 딸이요 못쓸 딸이건만 그 목숨을 구하도록 애를 졸이는 모양이 환하게 눈앞에 보이는 듯하였다.
"쇤네는 말을 타고 왔으니 얼마쯤은 빠르긴 빨랐지만 곧 뒤미처 하인배들이 달려올걸입시오. 아가씨, 어서 달아나십시오. 네, 아가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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