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59

"아사달님, 나 좀 보셔요. 아사달님!"
주만은 마침내 짜증을 내며 부르짖었다. 그래도 아사달은 정 놀리기를 쉬지 않았다.
정과 마치의 자지러진 가락과 그 황홀한 얼굴빛으로 보아 아사달은 다시금 신흥에 겨운 줄을 짐작할 수가 있었다.
똑바로 씹어 들어가듯 돌에 박힌 그 눈길은 벼락이 떨어져도 옆으로 쏠릴 것 같지 않았다.
'이 일을 어찌하나.'
주만의 가슴은 미어졌다.
"여보세요, 아사달님, 아사달님, 한시가 급합니다. 우리가 여기 이러고 있을 형편이 못 됩니다. 모든 일은 탄로가 나고 말았습니다. 아사달님, 아사달님, 우리는 어서 달아나야 합니다. 어서 서라벌을 떠나야 합니다. 우리집에서는 내가 없어진 줄을 알고 벌써 야단법석이 일어났는지 모릅니다. 하인들은 나를 잡으러 나섰는지 모릅니다. 아사달님, 아사달님!"
주만의 하소연은 애가 끊이는 듯하였건만, 아사달의 귓가에는 울리지 않는 것 같았다.
"글쎄 이게 웬일일까. 그런 엄청난 대공을 마치셨거든 그 돌을 왜 또 새기세요. 참, 기막히는 일도 있고는 볼 일. 아슬아슬한 고비에 그 돌을 붙잡고 계시면 어떡하자는 말씀예요. 어서 일어나요. 녜, 아사달님, 녜, 아사달님!"
쇠와 돌이 맞부딪는 여무지고 단단한 울림에 주만의 불이 붙는 듯한 간청도 가뭇없이 스러졌다.
물 얼굴에 자욱하던 안개가 차츰차츰 걷히었다. 잿빛으로 조으던 물결은 파름파름하게 눈을 떴다. 불그스름한 기운이 흐늘흐늘 춤을 추는 것은, 돋아 오는 햇발이 미처 물 얼굴에까지는 닿지 않고 공중을 쏘아 그 광선이 반사를 일으키는 까닭이리라.
"아이 날이 아주 밝았네. 아이 해가 떠오르네. 이를 어쩌나, 이를 어쩌나."
주만은 길길이 뛰고 싶었다.
"아사달님, 아사달님!"
또 한번 부르짖어 보았으나 또한 아무 소용이 없었다. 구슬 같은 땀이 그 번듯한 이마와 콧마루에 주렁주렁 맺힌 걸로 보아 일에 얼마나 골똘한 것을 가리켜 줄 뿐.
"아사달님, 아사달님, 아사달님은 이 목숨이 끊어지는 줄을 모르시는군. 한 시각, 한 시각이 이 명을 재촉하는 줄 모르시는군. 그 정 자리가 한금 두금 나는 것이 이 몸과 피를 방울방울 마르게 하는 줄 모르시는군. 잡히기만 하면 이 몸이 연기로 사라지는 줄 모르시는군."
주만은 가슴이 찢어지도록 한숨을 쉬었다.
정질이 잠깐 늦추어지는 순간 아사달의 시선은 힐끗 주만을 보았다.
그 눈길은,
'제발 나를 괴롭게 말아 주시오. 제발 나를 가만히 내버려 주시오.'
하고 애원하는 듯하였다.
주만은 이토록 애절한 눈매는 처음 보았다.
일순간 아사달은 다시 눈길을 돌로 옮기었으나, 그 손에는 힘이 빠져나간 듯 정질과 마치질이 허전허전하는 것 같았다.
어젯밤에 나타난 아내의 모양은 영절스럽게 또렷또렷하였다. 비록 환영일망정 피가 돌고 맥이 뛰듯 생생하게 살아왔다. 한번 마치와 정을 들고 대하자, 마치 아내의 모습이 미리 새겨져 있는 것처럼, 정 지나간 자리를 따라 대번에 동글 갸름한 얼굴의 윤곽이 드러나고 그 야들야들한 뺨의 보드라운 선이 그리어졌다. 눈썹 언저리를 도두룩하게 솟게 하여 그 가늘고도 진하고 초승달처럼 고부장하게 휘어들어 약간 꼬리를 처뜨리게 하고는 은행꺼풀 같은 눈시울을 아렴풋이 쪼아 내었다.
그는 어느결에 달이 기운 줄도 몰랐다. 어느결에 새벽안개가 열 겹 스무 겹 저를 에워싼 줄도 몰랐다. 어느결에 동이 훤하게 밝아 온 줄도 몰랐다.
안청이 그 중에서 띠룩띠룩하는 듯이 눈시울을 다듬어 내기에도 잔손질이 수없이 들었다.
눈시울을 가까스로 끝내어 이번에는 더 어려운 눈. 아사달은 처음엔 상글상글 웃는 눈매를 찍어 내려 하였건만, 암만해도 마지막으로 주고받은 그 눈물 괸 눈매만 눈에 밟히어 어쩔 수 없었다. 그는 그 슬프고도 아름다운 눈매를 새겨 내기에 열고가 났다.
정은 돌 위에서 떤다. 암만해도 그 눈매가 뜻대로 새겨지지를 않는 것이었다.
그때였다. 아니다, 그때에야 그는 제 옆에 인기척을 느끼었다. 그리고 그것이 다른 사람 아닌 주만인 줄도 온몸으로 느끼었다. 기실 주만은 그보다 훨씬 먼저 와서 부르고 외치었건만, 그 애끊이는 하소연도 도무지 들리지 않았던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