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57

경신 형제 앞을 물러나온 주만은 무서운 고역이나 치르고 난 것처럼 한동안은 몸과 마음이 얼얼하였다.
한번 불리어 갔다 왔으니 이 밤으로 또 찾지는 않으리란 생각이 들자 그는 부랴부랴 간단한 행장을 수습하였다. 행장이래야 옷 한 벌은 입고 가면 고만이요, 노리개 보물 같은 것은 제가 가장 아끼고 사랑하는 것만 골라서 몸에 지니었다.
인제는 영 이별이구나 하매 새삼스럽게 방 안이 휘둘러 보이었다.
막 방문을 열고 나오려 할 제 뜰 앞에서 인기척이 났다.
주만은 깜짝 놀랐으나 그것은 다른 사람 아닌, 딸의 장래를 걱정하는 사초부인이었다.
주만은 한옆으로 이런 경우에 나타난 어머니가 한없이 민망하였으나, 한옆으로는 이제 한번 떠나면 다시 못 뵈올 자정 깊으신 어머니를 뵈옵고 마음속으로나마 작별을 여쭙게 되는 것이 한결 섭섭한 정을 풀어 주는 듯도 하였다.
사초부인은 나들이옷을 입은 딸을 보고 질색을 하고 말리었다.
이 아슬아슬한 고비에 경신 형제가 찾아온 것은 하늘이 도우신 게라는 둥, 네가 경신을 보고 아무리 아사달과의 관계를 털어놓았다 하더라도 경신이가 다시 올 적에는 네 말을 믿지 않은 것이라는 둥, 무슨 일이 있더라도 그는 끝끝내 너를 아내로 삼을 작정이니 너만 고집을 세우지 않으면 일이 올곧게 되지 않겠느냐, 두말도 말고 시집을 가게 하여라, 그 아사달이란 사람도 너만 가지 않으면 기다리다 못하여 제 아내를 찾아갈 것 아니냐, 제발 이 늙은 부모를 버리지 말아 다고…….
사초부인은 암만해도 단념을 못 한 듯 또 아까 말을 되풀이하였다.
주만은 굳이 어머니의 말씀을 반대하지도 않았다. 지금 와서 반대를 하는 것도 새삼스러운 일이었다.
무남독녀 외동딸을 영구히 잃게 되는 어머니의 심정!
중언부언하는 어머니의 정곡을 생각하매 주만의 가슴은 쓰라리었다. 늙은 부모를 버리지 말라는 마지막 부탁엔 여무지게 마음을 먹은 주만에게도 쏟아지는 뜨거운 눈물을 걷잡기 어려웠다.
밤이 이슥하여 자시가 지나고 축시가 지나도 사초부인의 긴 푸념 잔 사설은 그치지 않았다.
듣기만 하고 있는 딸을 보고 사초부인은 적이 안심이 된 듯 새벽녘에는 그대로 쓰러져서 고단한 잠에 떨어지고 말았다.
'저는 가요.'
가늘게 코까지 고는 어머니의 뺨에 살그머니 제 뺨을 대어 보고 주만은 몸을 일으켰다.
그는 차마 떨어지지 않는 자국을 가까스로 떼어 뒷문으로 빠져나왔다.
왁자지껄하게 털이도 깨울 수 없고, 또 털이를 데리고 갈 필요도 없었다. 그러니 말도 끌어 내올 수 없어, 그는 혼자 걸어서 불국사를 향하는 수밖에 없었다.
다행히 새벽달은 밝아서 길은 어둡지 않았으나, 어쩌면 걸음이 이렇게 더딜까. 마음이 급할수록 길은 더욱 늘어나는 듯, 말을 탔으면 벌써 들어갔을 텐데 반에 반절도 못 온 듯하였다.
길가에 행인이 없는 것을 다행으로 주만은 두 주먹을 불끈 쥐고 줄달음을 쳤다.
하하 내어뿜는 그의 숨길은 유리 같은 맑은 공기에 안개처럼 서리었다.
'이 밤이 새기 전에.'
주만은 달음박질을 하면서도 속으로 뇌고 또 뇌었다.
이 밤이 새기 전에 이 서라벌을 떠나야 한다. 어머니 잠 깨시기 전에, 아버지 아시기 전에 한 발자국이라도 더 멀리 떨어져 있어야 한다.
주만이 불국사 대문을 두드릴 때에는 밝은 달빛도 희미하게 스러지며 동이 트기 시작하였다.
문지기가 먹은 간이 있어서 잠결에도 주만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얼른 대문을 열자 주만은 쏜살같이 달려들어갔다. 등뒤에서 문지기가 자기를 부르는 듯도 하였지만, 주만은 뒤도 돌아보지 않고 아사달의 처소로 달리었다. 닫혀진 덧문을 두드리며,
"아사달님, 아사달님!"
미리 불러서 선통을 하였건만, 방 안에서는 아무 기척이 없었다.
"아직 주무시나."
주만은 혼자 속살거리고 문을 덜컥 열었다.
아사달이 누워 있을 자리에 아사달은 없고 비어 있었다.
'웬일일까!'
주만의 가슴은 까닭 없이 내려앉는다.
웃목에서 자던 차돌이가 인기척에 놀라 일어났다.
"아사달님이 어디 가셨느냐."
주만은 급하게 물었다.
"모르겠어요. 어제 나가신 뒤로 들어오시지를 않아요."
차돌은 졸리운 눈을 비비며 대답하였다.
"응, 어제 나가 안 들어오셨어!"
주만의 눈은 호동그래졌다. 그러면 나를 버리고 혼자 발정을 하였는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