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만은 눈앞이 캄캄하였다.
내일 모레면 아사달과 두 손길을 마주잡고 곱다랗게 자취를 감출 수 있었거늘, 하필 오늘 밤으로 그 일이 탄로가 날 줄이야.
내일로라도 아버지가 아시기만 하면 제 목숨은 연기로 사라질 수 밖에 없었다.
그는 마지막으로 이틀 말미를 어머니에게 청하였던 것이다.
사초부인도 아무리 달래도 타일러도 도무지 딸의 뜻을 빼앗지 못할 줄 깨닫자, 흉격이 메어지나마 딸의 소원을 들어주는 것이 눈앞에 참혹한 꼴을 보느니보다는 얼마나 나은지 몰랐다. 이왕지사 틀린 일이라면 그 지긋지긋한 비극을 하루라도 연기를 하는 것이 그도 원하는 바였다. 하루 이틀 끄는 동안에 혹은 무사타첩이 될는지도 모른다. 그는 암만해도 이런 비참한 사단이 벌어지리라고는 믿어지지 않았다.
금이야 옥이야 귀히귀히 길러 낸 딸이 설마 불길에 생목숨을 태우게 된다는 것은 꿈에도 상상할 수 없는 일이요, 그렇게 귀히 될 줄 알았던 주만이 석수장이의 첩이 되어 남의 뒷손가락질을 받을 것 같지를 않았다.
제가 아무리 고집을 세워도 경신에게 시집을 가고는 말려니 하는 터무니없는 희망도 없지 않았다.
그래서 내일 아침 아버지가 다시 물으시는 한이 있더라도, 달도 밝고 해서 제 동무의 집에 놀러 갔다가 바람을 쏘이고 감기가 몹시 들어 몸져 누워 있다고 꾸며 대기로 모녀간에 작정이 되었다.
이튿날이 되었다.
주만은 바늘방석에 앉은 듯한 송구한 마음으로 오마조마 무서운 제 운명을 기다려 보았으나 그날은 무사히 넘어갔다.
기실 유종은 한가위 명절 차비 까닭에 그날은 일찌거니 조회에 들어가게 되고, 파조해 나오자 경신 형제가 또 찾아왔던 것이다.
금량상은 제 아우를 필두로 여러 낭도를 데리고 이번 명절의 큰 모임에 궁술과 검술을 빛내기 위하여 상경한 것이었다.
큰 손님을 맞이하여 집안은 다시 벅쩍 괴었으나 그래도 사초부인은 틈틈이 별당에 와서 주만에게 아무 데도 나가지 말고 있으라고 부탁부탁하였다.
금량상 형제에게 보이려고 아버지께서 언제 주만을 부를지 모르는 까닭이었다.
경신은 다시 유종의 문에 발을 들여놓아 주만을 괴롭게 할 것을 꺼리었지만 제 형이 끄는 바람에 아니 올 수가 없었던 것이었다.
주만도 이런 판에 몸을 빼나갈 수도 없었다. 이번 찾는 데 자기가 또 없었다가는 참으로 무서운 사태는 벌어지고 말 것이다.
얼른 부르기나 해서 제 할 구실을 치르기나 해버렸으면 그래도 마음이 놓이겠는데 해가 떨어져도 부르러 오지를 않았다.
주만은 안절부절못하였다.
아사달이 오늘이라도 길을 떠난다고 하였는데 암만 기다려도 내가 오지를 않으니 혼자서 발정을 하지나 않을까. 일일이 삼추같이 제 고장 가기를 원하고 바라는 그가 아닌가.
'그가 설마 그럴 리야 있을까. 그렇게 떡먹듯이 언약을 해놓았는데 나를 버리고 혼자 가실 리야.'
생각하고 스스로 안심을 해보려 하였건만 애가 키이고 마음이 졸여서 견딜 수가 없었다.
밤이 되었다.
암만해도 조맛증이 나서 참을 수 없었다. 여태까지 부르시지 않으니 오늘 밤 안으로는 찾을 것 같지 않아 옷을 주섬주섬 입고 있을 때 별안간 손님께 나와 보이라는 전갈이 왔다.
초저녁까지 양상이 데리고 온 낭도들을 대접해 보내고 형제만 남게 되자 유종은 딸을 부르러 보낸 것이었다.
주만은 사랑에 나가 먼저 양상을 보고 절을 하매 양상은 일어나 맞절을 하였다.
"여보게, 어린것 절을 그냥 받으실 게지 맞절이 무엇인가, 허허."
유종은 오래간만에 막역의 친구를 만나 매우 유쾌한 모양이었다.
"그게 무슨 말인가, 장래 제수씨의 절을 어떻게 앉아서 받는단 말인가, 허허."
양상도 크게 웃었다. 그 웃음 소리와 음성도 천연 아우와 같았다. 그 '장래 제수씨'란 말에 주만의 귀는 따가웠다.
"경신이 너는 벌써 이 아가씨가 초면이 아니겠구나."
하고 양상은 경신을 돌아보고 웃었다.
주만이 들어오자 한옆에 비켜섰던 경신은 어색하게 웃어 보이었다.
주만은 차마 눈을 들어 경신을 볼 수가 없었건만 얼른 보기에도 그의 자기를 보는 눈엔 애연한 빛이 가득히 차 있었다. 단 며칠 안 되는 사이에 몹시 파리해진 주만의 얼굴을 보고 그는 매우 놀란 까닭이다.
주만은 이내 몸을 일으켜 내빼 나왔지만 그 짧은 동안에도 그의 등은 흠뻑 젖었다. 그는 난생 처음으로 괴롭고 어색한 순간을 경험하였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