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54

구름 한 점 없는 새말간 하늘에 갓 솟은 불그스름한 햇발이, 그 어마어마한 광선의 부챗살을 차차 펴기 시작한다.
밤내 풀 끝에 깃들인 이슬들은 장차 사라질 제 운명도 모르는 양, 소리 없이 굴고 아울리며 더욱 영롱하게 더욱 투명하게 그 좁쌀낱만한 몸뚱어리를 번쩍인다.
저 건너 언덕에 우뚝 선 소나무들의 그 촘촘한 잎새로도 가느다란 빛발이 줄줄이 새어 흐르다가 어느결에 그 밑둥이 환해지자, 그 기름한 몸이 넓죽이 엎드려 그림자못 이쪽 저쪽을 거의 가로질렀다. 물결은 이 난데없는 검은 그림자에 놀라 떠다밀듯이 일렁일렁 모여들자 소나무는 물 속에서 우쭐거린다.
별안간! 침침하던 물 얼굴에 눈이 부신 금줄이 섰다. 처음에는 조붓하던 그 폭이 넓게넓게 어란을 잡아 나가는 대로 금실 은실이 겹겹으로 얽히고 설키고 휘돌고 감돌고, 수없는 별들이 뭉치뭉치 덩이덩이 뛰는 양, 넘노는 양, 춤추는 양 바그르르 헤어지는가 하면 출렁출렁 모여든다. 갈매기 몇 마리가 그 흰 날개를 더욱 희게 번득이며 너울너울 물 얼굴을 스쳐 나는 것은 금빛으로 춤추는 물꽃을 고기만 여겨 쪼아 먹으려는 탓이리라.
이웃 동네에서 밥 짓는 연기가 몇 가닥 떠올라 수멸수멸하는 물 속에서 토막토막 끊어져서 안개처럼 서리었다가 사라진다.
못가의 아침.
아사달은 넋 잃은 사람 모양으로 섰던 그 자리에 한동안 그린 듯이 서 있다가 지척지척 발길을 옮기었다.
그는 암만해도 아사녀가 죽었다는 것이 믿어지지 않았다.
콩콩이가 아무리 죽었다고 슬퍼하고 푸념을 하여도 종시 곧이들리지를 않았다.
아사녀가 서라벌 와서 죽다니 말이 되느냐. 내 있는 지척에 와서 죽다니 말이 되느냐. 그 고생한 원정도 들려주지 않고 그 안타까운 하소연도 일러주지 않고 죽다니 말이 되느냐. 그 얼마나 더 장성해지고 더 아름답게 된 모양을 보여 주지 않고 죽다니 말이 되느냐. 그 먼 길에 나를 찾아오느라고 그 파리해진 얼굴을, 그 저는 다리를 보여 주지 않고 죽다니 말이 되느냐. 그렇게 의젓한 그였거늘, 그렇게 차근차근한 그였거늘, 그렇게 나이보다 숙성한 그였거늘, 얌전한 그였거늘, 사랑 많은 그였거늘 나를 버리고 죽다니 말이 되느냐.
설령 어쩔 수 없이 죽는다 하더라도 하필 대공에 마지막 손을 뗀 어젯밤에 죽다니 말이 되느냐. 그리움도 끝이 나고 기다림도 막음한 하필 어젯밤에 죽음의 길로 나아갈 까닭이 있느냐.
거짓말이다. 멀쩡한 거짓말이다. 아사녀는 살아 있다. 분명히 살아 있다. 이 휘넓은 못둑 어디에서 어릿거리고 있다. 나 오기를 기다리고 있다. 내 찾기를 기다리고 있다.
이 발이 자무는 풀을 봐라, 어디 아사녀가 죽었다고 속살거리느냐.
저 넘노는 금물결 은물결을 봐라, 어디 아사녀가 죽었다는 흔적이 있느냐.
저 하늘을 봐라, 어제와 꼭 같이 푸르지 않으냐.
저 햇발을 봐라, 어제와 꼭 같이 밝지 않으냐.
그런데 아사녀만 죽어! 안 될 말! 안 될 말!
아사달의 미친 듯한, 꿈꾸는 듯한 발길은 못둑을 걷고 또 걸었다. 하늘이 두 쪽이 나도 기어코 아사녀를 찾아내고야 말려는 것처럼.
"허, 저것 봐, 큰일났네, 큰일나."
다리를 뻗고 앉아서 넋두리를 넣어 가며 아주 법짜로 울고 있던 콩콩이는 울음을 그치고 중얼거렸다. 아직도 우느라고 핏발만 선 그 눈에는 무서움의 그림자가 떠돌았다.
"킁 킁, 어쩌면 그 걸음걸이까지 부부끼리 저렇듯이 닮았을까. 고개를 옆으로 기우뚱하게 타라메어 연방 못과 둑을 번갈아 보고 가는 꼴이란 어쩌면 천연 제 계집 같을까. 암만해도 제 계집 혼령이 뒤집어씌인 것 같은데…… 저러다가 아주 미치지나 않을까."
콩콩이는 무서운 중에도 제 찾을 것을 못 찾을 것이 걱정이었다.
"설마 사람이 간 대로 미치기야 할라고, 킁 킁. 아무튼 년놈이 다 불쌍은 하군."
하고 동안이 떠서 눈앞에 아물아물하게 보이는 아사달의 지척거리는 꼴을 한동안 바라보다가 몸을 털고 일어났다.
"저렇게 미친 증이 날 적엔 하루 이틀 가만히 내버려두어야 돼. 미친 증이 가라앉기 전엔 막무가내야."
곁에 사람이나 있는 듯이 제가 저를 타이르고 시장기가 나서 제 집으로 올라가 버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