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48

아사달은 그날 밤 주만을 작별한 뒤에도 차마 떼치기 어려운 듯이 달빛을 밟으며 다보탑과 석가탑의 둘레를 거닐었다.
삼 년이란 길고 긴 세월을 두고 제 있는 재주와 정력을 다 기울여 지어 낸 두 탑! 제 살과 피를 묻혀서 빚어 낸 두 탑! 넘실거리는 은물결에 둥 떠서 반공에 헤어오르는 듯한 그 두 거룩한 모양을 번갈아 바라보며 아사달은 무량한 감개에 싸이었다.
솟아나는 흥에 겨워서 이 세상 것 아닌 신품을 지어 낸 때에 오직 참된 예술가라야만 맛볼 수 있는 감흥과 만족도 거기 있었다. 고심참담한 자취를 더듬어 볼 제 애 졸이던 지긋지긋한 기억도 거기 있었다. '인제는 아주 손이 떨어졌구나' 하매 다 큰 자식이 어버이의 품을 떠난 것처럼 허수한 적막도 거기 있었다. 막중 대공을 이룩하였으니 번쩍이는 영광이 자기를 기다리는 기쁨도 거기 있었다.
그러나 아사달에게는 이 모든 것보담 오늘 밤따라 고장의 소식이 새삼스럽게 그리웠다.
주만이 제 흉중을 꼭 찍어 낸 것과 같이 이 자리에 아사녀가 있었던들 제 남편의 대공을 마친 것을 얼마나 즐겨할 것인가. 그는 멀리 동쪽 하늘을 바라보고 이 공사 끝내기를 손꼽아 기다렸으리라. 아침으로 저녁으로 축수축수하였으리라.
늙으신 스승은 과연 이날까지 부지를 하셨을까. 만일 어느 때 불길한 예감처럼 무슨 일이나 있었다면 홀로 남은 아사녀는 과연 어떻게 되었을 것인가.
'만일 그런 불행이 있었다면 설마 나에게 기별이 없을 수 없으리라. 무소식이 호소식이라 함은 이를 두고 이름이리라.'
아사달은 자기의 불길한 생각을 곧 물리쳐 버렸으나 삼 년 동안에 자기도 가신 한 장 붙이지 못한 것을 생각하였다.
'아사녀가 좀 궁금해하였을까, 야속해 여기지나 않았을까?'
이따금 집안 생각을 않은 것도 아니지만, 절 안에 꼭 들어박혀 있고 보니 부여 간다는 사람을 좀처럼 만날 수도 없고 그렇다고 자기 형세로 우정 전인도 못 할 형편도 형편이었다. 물론 자기가 등한한 탓도 탓이었다. 기어코 인편을 얻으려고만 하였을 것 같으면 삼 년 동안에 한두 번이야 기회가 없지도 않았겠지만 탑 짓기에 몸과 마음이 온통 쏠리고 지친 까닭에 다른 일이란 손끝 까딱하기 싫었고 게다가 그는 편지를 잘 쓸 줄 몰랐던 것이다.
아사달은 팔짱을 낀 채 아내의 모양을 눈앞에 그리어 보았다.
삼 년을 그린 탓인가 그 안타까운 모양이 상막하게 얼른 나타나지 않는다. 상긋이 웃는 입술은 또렷하건만 코와 뺨 언저리가 어쩐지 아사녀 같지 않고, 맑고 상냥한 눈동자는 천연한데 이마와 귀밑이 흐리마리해서 알아볼 길이 없었다.
어찌하면 얼굴 전체가 분명히 나타나다가도 눈 한번 깜짝할 사이에 변형이 되고 만다. 마치 손으로 물을 움키는 것처럼 조각보 모은 듯한 그 윤곽이 이내 뿔뿔이 흘러내리고 만다.
아리숭아리숭한 얼굴을 그리다가 말고 아사달은 혼자말로 중얼거렸다.
"그새 내가 아사녀의 얼굴을 잊어버렸는가, 허, 참."
그러나 이것은 가벼운 뜻에서 나온 말이었다. 자기가 자기에게 거는 농담에 지나지 않았다. 삼 년이 아니라 삼십 년이 되기로 잊혀질 것이냐. 평생을 그리기로 잊어서 될 말인가. 몇 달 전까지도 영절스럽게 눈에 밟히던 그 얼굴이 아니냐.
"내일이라도 발정을 해야."
아사달은 저를 다지듯 또 한번 뇌었다.
실상 지금 와서 그는 아사녀의 환영을 그려 보려고 애쓸 필요도 없었다. 그릴 날이 많이나 남았어야 하다못해 안타까운 환영이라도 그려 볼 것이지, 인제야 참사람 참얼굴을 대할 날도 며칠이 남지 않았거늘 애써 환영을 그려 볼 것이 무엇이랴.
별안간 아사달의 눈앞에는 주만의 얼굴이 떠나왔다. 눈이 부시도록 뚜렷하게 떠나왔다. 방장 그려 본 아사녀의 환영과는 대상부동으로 주만의 그것은 어마어마하게 크고도 생생하였다.
삼 년 전에 이별한 아사녀와 조금 아까 헤어진 주만과는, 마치 갈린 동안이 오래고 가까운 데 따라 기억에 되살아나는 정도를 비교나 하는 것 같았다.
문득 떠오른 주만의 환영에 눌리어 부서질 것 같으면서도, 아까는 그려 보려도 잘 나타나지 않던 아사녀의 환영도 비록 작으나마 굳이굳이 나타났다.
"주만을 어떻게 할까."
아사달은 두 환영에 가위나 눌리는 것처럼 멍하니 눈을 뜬 채 거의 신음하는 소리를 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