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44

여간 큰일을 당해도 냉정한 어머니가 이렇게 기급절사를 하기는 난생 처음이었다.
주만도 엉겁결에 몸을 소스라치며 외마디 소리를 지를 뻔하였다.
사초부인은 이내 몸을 바로잡았으나 그 머리는 힘없이 벽에 떨어뜨리었다.
"그러면 그 종작없는 말에도 무슨 터무니가 있었던가."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하 하며 한숨을 내쉬었다.
모처럼 기쁨에 달떴던 주만의 가슴에도 '예사가 아니구나' 하는 불길한 예감이 섬뜩 지나갔다.
"그래 불국사에는 왜 갔더냐."
영창 밖을 노려보며 사초부인은 다시 털이에게 채쳐 물었다.
"저어……."
털이는 벌써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며 대답을 이루지 못하고 힐끔힐끔 방 안의 제 아가씨의 기색만 살피었다.
"이년이 왜 말을 못 할꼬."
무슨 거조라도 당장에 낼 듯이 사초부인의 호령은 떨어졌다.
"제가 데리고 갔다 뿐이지 털이는 아무 죄도 없어요."
주만은 털이를 두둔해서 어머니를 말리는 수밖에 없었다.
"내가 너 같은 년을 사람년이라고 믿고 아가씨를 모시고 있으라고 했더니 이년 아가씨를 모시고 갈 데 안 갈 데…… 이년 보기 싫다. 썩 물러나라. 이년 어디 두고 보자."
으름장을 남기고 사초부인은 열었던 영창을 닫아 버렸다. 털이에게도 모녀 단둘이 주고받을 수작을 듣기기 꺼리는 까닭이리라.
"그래도 이년이 머뭇머뭇하고 서 있어."
소리를 질러서 털이가 뜰에 내려 발자국 소리가 멀어지기를 기다려 사초부인은 제 무남독녀 외동딸에게 눈을 돌리었다.
그 눈길은 뜻밖에도 부드러웠다. 자애와 슬픔에 가득 찬 눈길이었다.
명민한 사초부인은 딸의 태도와 털이의 말을 들어 보아 홑으로 단속과 꾸중으로 끝날 일이 아니고 커다란 비극이 자기네를 기다리고 있는 것을 마음 어딘지 느끼었음이리라.
주만은 그 부드러운 눈길이 성난 회초리보다 더 송구스러웠다. 그는 몸둘 곳을 모르고 숙인 고개는 거의거의 방바닥에 닿게 되었다.
어머니는 아무 말 없이 한동안 주만의 얼굴을 바라보다가,
"아가, 구슬아가, 불국사에는 왜 갔더냐. 그 자세한 내력을 이 어미에게 알려 다오."
그 목소리는 어느결엔지 눈물에 젖었다.
주만은 가슴이 찌르르해지며 대번에 눈물이 쏟아질 듯하였다.
차라리 역정이나 내시고 펄펄 뛰기나 하셨더면! 이 불효한 딸자식을 불채찍으로 바수어 내기나 하셨으면!
이런 어머니를 어이 속이랴, 기이랴. 그러나 이 말씀을 어떻게 여쭐 것인가. 일점 혈육이란 오직 나 하나뿐이거늘 어떻게 어버이를 버리고 멀리 달아나겠다는 말씀을 아뢸 것인가…….
"끝끝내 이 어미를 기일 테냐."
주만은 그대로 푹 엎어져서 어린애 모양으로 엉엉 소리를 내어 울었다.
"아가, 아가, 갑갑하구나. 울지만 말고 말을 하려무나."
"저는, 저는 죽을 죄를 졌습니다. 오늘부터라도 자식으로 아시지 말아 주십시오……."
"무슨 죄란 말이냐. 말을 해야 알지 않느냐."
어렴풋이 무슨 탈이 난 줄은 짐작이 갔으나마 자기의 불길한 짐작이 정작 들어맞고 보니 더욱 흉격이 막히었다.
주만은 마침내 사월 파일 밤에 탑돌기를 하다가 아사달을 만난 데서부터 시작하여 자초지종의 일체를 대강 이야기하고 말았다.
사초부인은 들을수록 철없는 애들의 불놀이에 가슴만 뜨끔뜨끔하였다. 세상에는 괴상한 변도 있고는 볼 일이다.
그 석수장이가 총각도 아니요, 어엿한 아내가 있다는 데 더욱 아니 놀랄 수 없었다.
"그이에게 부인이 열이 있고 스물이 있으면 어떠해요. 저는 그이의 아내가 되려는 건 아닙니다. 다만 그이가 없고는 저는 이 세상에 살 수가 없습니다. 그이의 곁이 아니고는 하루라도 안절부절을 못 할 지경입니다. 저는 그이의 여제자가 되려고 합니다. 그이의 시종을 들고 그이의 재주를 배울 뿐입니다."
딸의 열에 뜬 잠꼬대 같은 넋두리를 어이없이 듣고 있던 사초부인은 얼마를 주저하다가 마지막으로 한마디 물어 보았다.
"그러면 몸은 더럽히지 않았단 말이냐."
"몸이야 왜 더럽혀요."
주만은 서슴지 않고 대답하였다.
사초부인은 이 한마디에 한 그믐밤빛 같은 어둠 속에서 실낱 같으나마 한 가닥 희망의 줄을 발견한 듯이 반색을 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