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43

주만은 아사달의 무사한 얼굴만 보면 선 걸음에라도 돌아선다는 것이 미룩미룩 밤이 이슥한 연후에야 집에 돌아오게 되었다.
그 동안이라도 하루가 열흘 맞잡이로 그립던 알뜰한 임을 만나 보고야 차마 발길이 선뜩 돌아서지도 않았거니와 오늘 밤이란 오늘 밤이야말로 그 탑이 끝나지 않았느냐. 하루하루 목숨이 잦아질 듯이 애가 키이고 가슴이 졸이던 그 탑이 이제야 일손이 떨어지지 않았느냐.
이 기쁨! 이 감격! 이 앞에는 모든 불안과 모든 위험이 사라지고 말았다. 어수선한 소문도 겁낼 것이 없다. 불의의 변도 두려울 것이 없다. 그의 앞길에는 한 조각 검은 구름도 얼찐거리지 않았다. 찢어지게 밝은 저 달과 같이 행복의 길은 환하게 열리었다.
"언제쯤 길을 떠나실지."
주만은 마지막으로 또 한번 다져 보았다.
"글쎄올시다. 내일 아니면 모레는 떠나 볼까 합니다."
아사달의 돌아갈 마음도 살과 같구나.
불국사를 나와 주만은 더욱 신이야 넋이야 말을 달렸다. 귓결에 지나치는 맑은 가을바람은 어떻게 이렇게 시원할까. 죽을 판 살 판 따라오는 털이의 꼴도 오늘 밤같이 우스운 적은 없었다.
집 가까이 다다르자 말은 털이에게 맡겨 보내고 별당 뒷문으로 돌았다. 미리 밖에서 열 수 있도록 만들어 둔 문을 거침없이 열고 들어서니 제 침방에 촛불이 그저 켜 있었다.
'웬일일까.'
주만은 적이 의아하였다. 그는 나갈 적에 흔히 촛불을 켜버려 둔 채로 나갔지마는 언제든지 제가 돌아올 무렵에는 그 촛불이 다 타서 꺼지고 마는 터이었다. 오늘 밤도 그럭저럭 꽤 늦었을 텐데 불이 그대로 있는 것은 이상한 일이었다.
마루에 가만히 올라서서 살그머니 영창을 열고 보매 자기 어머니 사초부인이 벽에 그린 듯이 기대앉아서 잠깐 졸다가 인기척에 놀란 듯이 눈을 번쩍 뜬다.
"너 어디 갔다 오느냐."
어머니는 첫마디에 묻는다.
주만은 어머니가 홀로 있는 것을 그리 큰일은 아닐 성싶어서 방 안에까지 들어는 섰으나 무어라고 얼른 대답할 말은 없었다.
"너 이 밤중에 어디를 갔다 온단 말이냐."
채쳐 묻는 어머니의 말소리는 전에 없이 쨍쨍한 울림을 띠었다.
"저어, 어디 좀 다녀와요."
응석 피듯 대답 안 되는 대답을 한마디하고 주만은 어머니와 동안이 뜨게 주저앉았다.
"다녀오는 데가 어디란 말이냐. 너 아버지께서 너를 찾으시다가 역정까지 내셨단다. 나는 여길 와서 세상 너를 기다리니 어디 와야지."
아버지도 찾으셨단 말에 주만의 가슴은 덜컹하였다.
"너 나이 한두 살이냐. 설령 동무 집에 놀러를 간다 해도 부모의 말을 듣고 다녀야 될 것 아니냐. 다 큰 계집애가 내일 모레로 시집갈 색시애가 밤나들이란 될 뻔이나 한 일이냐."
사초부인의 언성은 점점 높아 간다.
"……"
주만은 고개를 푹 숙이고 말았다. 바른 대로 사뢸 수도 없고 그렇다고 거짓말을 주워 댈 수도 없었다. 거짓말을 한다 한들 곧이들을 어머니도 아니었다. 자애는 깊지만 차근차근하고 밝은 어머니였다.
"어머니, 잘못했어요."
주만은 어릴 때 말버릇이 그대로 나왔다.
"어디를 갔다 왔기에 덮어놓고 잘못을 했단 말이냐."
어머니의 목소리는 카랑카랑하게 맑아진다. 화가 되게 날수록 조리가 정연한 사초부인이었다.
"그래 털이년은 또 어디를 갔느냐."
"데리고 갔다가 같이 왔어요."
"같이 왔다면 그년은 어디 있느냐."
사초부인의 말이 떨어지기 전에 창 밖에서 벌벌 떠는 털이의 목소리가 들려 왔다.
"쇠, 쇤네는 여, 여기 이, 있는뎁시오."
사초부인은 영창을 홱 열어젖뜨렸다.
털이는 벌써 초죽음이나 된 듯이 뜰 아래 저만큼 고개를 빠뜨리고 땅을 보고 서 있었다.
"이리 가까이 오너라. 이 마루 앞까지 올라서라."
사초부인은 될 수만 있으면 왁자지껄하게 큰소리를 내기 싫은 눈치였다.
"너 이년, 아가씨를 모시고 어디를 갔다 왔니."
말소리는 조용하나마 서릿발같이 냉랭하였다.
"저어, 저어, 달구경을 모시고……."
"달구경을? 그래 달구경을 어디로 모시고 갔다 왔느냐. 바른 대로 말을 해야 망정이지 만일 추호라도 기이면……."
"녜, 녜, 바른 대로 아뢰고 말곱시오. 녜, 녜, 저 불국사엘 모시고……."
"으응 불국사?"
하고 사초부인은 안간힘을 한번 쓰고 거의 기절이나 한 사람 모양으로 뒤로 넘어질 뻔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