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40

파조해 나오면서 여러 조관들은 힐끗힐끗 금지의 기색을 살피었다. 약삭빠르고 슬기롭기 늙은 여우와 같은 그도 오늘따라 왜 그런 주책없는 말씀을 아뢰어 필경 왕의 미타하심까지 입었을까. 행세하는 집 딸로 하향천한을 따른다는 것은 무슨 던적맞은 수작일까. 대관절 누구의 딸이 그런 짓을 저질렀던가.
딸 없는 이는 번쩍이는 호기심을 걷잡지 못하였고 딸 있는 이는 '혹시 내 딸이……' 하고 송구스러운 생각을 일으키고 집에 돌아가면 제 딸을 단단히 잡두리를 하리라고 벼르는 사람까지 있었다.
금지는 여럿의 시선을 느끼었던지 그 노리캥캥한 얼굴을 더욱 찡그려 붙이고 그 톡 불거진 눈을 해번득해번득 아래로 깔며 일부러 아칠랑아칠랑 느리게 걸어나왔다.
궁문을 다 나와서 수레에 오르려다가 말고 역시 수레에 오르려는 유종의 곁으로 왔다.
"여보 이손, 오늘은 신신치도 않은 일로 서로 다투게 되어 어심에 미안하구려. 내가 무슨 이손과 혐의가 있는 게 아니고……."
저는 푸느라고 하는 말인지 모르지마는 실룩실룩 떠는 그 입술은 감추지를 못하였다.
"금시중, 그게 무슨 말씀이오. 우리가 국사를 가지고 서로 다툰 것이지 사삿혐의야 왜 있겠단 말이오. 공과 사를 구별을 못 한다면 신자 된 도리에 어그러질 것 아니오."
유종은 독사나 옆에 온 듯 지겨운 듯이 한 걸음 물러서며 아까 머리끝까지 치받치었던 분노가 아직도 가라앉지 않은 양 그 범눈썹이 거슬러 일어섰다.
"우리가 한 조정에 같이 선 지 어느덧 사십 년, 공사고 사사 간에 의좋게 지내면 더욱 좋을 것 아니오, 허허."
하고 금지는 가장 너그러운 척을 하며 지어서 웃어 보이었다.
"그야 다 이를 말이오. 그러나 사람이란 소견이 다 각각이라 비록 이 흰 머리가 베어질지언정 어찌 제가 옳다고 생각하는 것을 기어이 임금을 속일 수야 있단 말이오."
유종의 말씨는 종시 풀리지 않았다.
"조정에서 하던 의논을 이 길거리에서 다시 되풀이할 거야 있소. 우리 사삿얘기나 합시다. 참 영애의 혼사는 작정이 되셨다니 고맙소이다."
"시중이 고마울 거야 무엇 있겠소. 금량상의 집안으로 보내게 되었다오."
유종은 더욱 퉁명스럽게 대답하고 눈을 부릅떠 금지를 노려보았다.
이자가 어전에서 그런 무엄한 소리를 꺼낸 것이 반은 제 딸을 빈정거림인 줄 몰라들을 유종이가 아니었다. 규중 처녀가 외간 남자를 예사로 대한다고 꼬집었지만 벌써 혼인이 다 된 장래 신랑과 신부가 제 부모 보는 앞에서 만나 보는 것이 무엇이 예절에 어그러진단 말인가. 그런 것은 천번 만번을 이렁성거린들 무슨 흉이 될 것이냐.
'네가 아무리 그 독사 같은 주둥아리를 놀려 보아야 도리어 왕의 찡그심을 받을 뿐 아니냐.'
"어 그 참 잘된 일이오. 그 혼사가 올곧게 된다면야……."
금지의 입술에는 찬웃음이 흘렀다.
"날짜까지 다 정해 놓은 혼사가 올곧게 안 된다는 것은 또 어떻게 하시는 말인지."
유종은 나이가 젊었으면 허리에 찬 보도를 빼어 들 뻔하였다. 이런 놈을 한 칼에 두 동강이를 내지 못하고 또 누구를 벨 것이냐.
"그러하시겠지. 정해 놓은 혼인이야 안 될 리가 왜 있겠소. 대관절 영애의 허락이나 맡으셨소."
금지의 말은 갈수록 버르장머리가 없었다.
"허락을 맡다니 어찌 하는 소리요."
유종의 화는 더 참으려야 참을 수가 없었다.
"그러면 이손은 아무것도 모르시는구려. 온 세상이 다 아는 불국사 사단도 모르는구려."
"불국사 사단?"
유종은 무슨 소리인지 몰라듣고 채쳐 물었다.
"여보 이손, 우리나라 법에 행실 잃은 계집애 처치를 어떻게 하는지 이손도 아시겠지."
"불에 태워 죽이는 거야 누가 모른단 말이오."
"아시기는 잘 아오마는 행하기는 어려우실걸."
"안 다음에야 왜 행하지를 못한단 말이오. 거혼한 혐의로 시중이 끝끝내 우리 부녀를 뜯는다 해도 아무 상관이 없소이다."
"어, 거혼한 혐의라니? 그런 신부는 가져갑시사고 절을 해도 내 쪽에서 거혼을 할 테요. 세상에 어디 사내가 없어서 하필 석수장이를……."
유종은 금지의 말이 무슨 소리인지 점점 알아들을 수가 없었으나 웬일인지 차차 분함만 치받쳐올랐다.
"석수장이란 또 웬말인고."
"아따 그렇게 못 알아들으시겠거든 영애에게 좀 자세 물어 보구려. 등하불명이란 이손 같은 이를 두고 하는 말인가 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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