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39

이 나라의 큰 명절 팔월 한가위도 글피로 박두하였다. 오늘의 조회에서는 신궁에 큰 제향을 올릴 절차와 제향을 마친 다음에는 신궁 넓은 마당에서 궁술과 검술의 모임을 열 것과, 밤에는 육부의 처녀들을 모아 길쌈내기할 것을 결정하였다. 그리고 그 처녀들을 두 패로 나누는데, 그 우두머리가 될 두 처녀는 연례에 따라 시중 금지의 딸 아옥과 이손 유종의 딸 주만으로 작정이 되었다.
시중 금지는 문득 반열에서 나와 옥좌 앞에 부복하였다.
"소신이 아뢰올 말씀이 있습니다."
여러 조신들은 내심으로 '저 독사 같은 자가 또 무슨 소리를 하려는고' 하면서 긴장한 얼굴로 그 깐깐한 목소리에 귀를 기울였다.
"궁술과 검술을 권장함은 우리나라의 오래 내려오는 관습이오라 지금 졸연히 폐지하기는 어렵다 하겠사오나 오늘날 같은 태평성대에 살벌의 기운을 일삼는 것은 결코 화길한 일이 아니옵고 개중에는 지체와 재주를 믿사옵고 성군작대하와 양민을 괴롭게 하오며 심지어 인명을 해하는 일도 없지 않다 하온즉 유사에 명하시와 이런 무뢰지배를 사실케 하시와 국법을 바로세우고 상무지풍을 누르시어 혈기방장한 젊은 무리의 예기를 꺾으시고 성경현전에 잠심케 하시와 국가 백년대계의 귀취를 밝히심이 좋을까 하옵니다……."
시중 금지의 말이 채 마치기 전에 이손 유종은 매우 흥분된 걸음걸이로 반열에서 나왔다.
"지금 아뢰온 시중 금지의 말씀은 천만부당한 줄로 아뢰옵니다. 문무를 병행시킴이 치국의 대경대법이거늘 이제 시중은 무를 버리고 문만 취하려 하오니 국사를 그르침이 이에 심한 자 없는 줄로 아뢰옵니다. 우리나라가 최이한 소국으로 삼한 통일의 위업을 이루옴은 위로 열성조의 천위와 성덕의 소치이옵고 아래로는 우리나라 고유의 국선도가 사기를 진작한 까닭인 줄로 아옵니다. 대개 무는 국민의 원기이오라 원기를 꺾어 버리고 흥하는 나라가 어찌 있사오리까. 고금흥망의 자취를 살펴보오면 문약에 흐르고 망하지 않은 자 없사오니 태평성대라 하여 문만 숭상하옴은 멀지 않은 장래에 큰 화를 빚어 내올 줄 아옵니다. 치에서 난을 잊지 않고 난에서 치를 잊지 않사와야 나라를 태산반석의 튼튼한 자리에 올려놓는 소이인 줄로 아뢰옵니다. 개중에 불량배가 있사오면 저절로 국법이 있사오니 그런 무리로 말미암아 상무지풍을 누른다는 것은 본말을 전도하와 성명을 가리움인가 하옵니다."
유종의 우렁찬 목소리는 쩌렁쩌렁 전각을 흔드는 듯하였다. 그리고 그 은사실 같은 긴 수염이 매우 분개한 듯이 푸르르 떨리는 것 같았다.
금지는 매우 못마땅한 듯이 칵 한번 기침을 하고 나서 목소리를 가다듬어,
"이손 유종은 소신의 아뢰온 본뜻을 잘 모르는 듯하옵니다. 소신도 결코 무를 아주 버리고 문만 취하자는 것이 아니옵니다. 문무병행이야 삼척동자라도 다 아는 것이온즉 하필 이손의 말을 기다릴 것도 없는 줄 아뢰옵니다. 이손은 문약이 나라를 그르친다 하오나 한무제가 문으로 백성을 피폐케 하였사오며 수양제가 문으로 나라를 잃었사오리까. 성쇠의 자취가 소소히 역사에 남았거늘 이런 사실에는 일부러 눈을 감아 버리려는 이손의 뜻이 어디 있는 줄 소신은 알지 못하겠사옵니다. 궁술, 검술의 모임을 연다 하셔도 될 수 있는 대로 그 규모를 줄이시고 등용의 길을 좁히심이 지당하온 줄로 아뢰옵니다."
하고 금지는 제 옆에 나란히 부복한 유종을 곁눈으로 흘겨보았다.
늙으신 왕은 성가신 듯이 고개만 좌우로 흔드시고 아무런 처분이 없으시었다. 만득하신 왕자께서 워낙 나약하시어 첫가을 바람이 불자 또 감기에 걸리어 몸져 누운 것을 생각하시고 어서 조회가 끝나서 들어가 보시고 싶으셨다.
금지는 더한층 목소리를 가다듬어,
"그는 그러하옵거니와 또 한마디 아뢰올 말씀이 있습니다. 이것도 상무지풍에서 오는 폐단인 줄 아옵거니와 근래 남녀의 강기가 어지러워진 것은 참으로 통탄하올 일로 아뢰옵니다. 남녀는 국민의 기초이오라 한번 그 관계가 어지러우면 곧 골품이 불순해지는 것이온즉 어찌 작은 일이라 하오리까. 칠세에 남녀부동석이라는 뚜렷한 성훈이 있사옵거늘 심규의 처녀가 예사로 외간 남자를 대하옵고 상민천한의 자녀야 거론할 것이 못 되옵지만 한 나라의 사표가 되올 집안의 딸이 제 지체도 돌아보지 않사옵고 하향천한을 따른다는 해괴한 소문이 항간에 파다하온즉 이런 괴변이 어디 있사오리까……."
금지가 채 말을 마치기 전에 왕은 듣기 싫으시다는 듯이 파조해 버리시고 내전으로 듭시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