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36

아사녀와 마주친 말 탄 여자 둘은 물론 주만과 털이였다.
주만은 임해전 궁장 기슭 후미진 길에서 경신과 만나서 마지막 귀정을 지은 이튿날, 경신은 아무 일도 없었던 것처럼 장래 장인 장모와 주만에게까지 깍듯이 작별인사를 하고 제 고장으로 떠나가 버렸다.
주만은 경신에게 한량없는 존경과 감사를 올리며 위태위태하던 제 사랑에 한 가닥 성공의 광명이 비친 듯하여 마음 그윽이 든든하고 기뻐하였다.
이제 남은 문제는 오직 하루바삐 탑이 완성되어 아사달과 두 손길을 마주잡고 멀리 사랑의 보금자리를 찾아 종적을 감추면 고만이다.
탑이 얼마쯤 되었는가. 못된 자들의 엄습을 당한 아사달이 어떻게 되었는가. 차돌의 말을 들어 대강은 알았지마는 새삼스럽게 궁금증이 나서 견딜 수가 없었다. 아무리 위험한 불국사이기로 아니 오고는 배길 수 없었다. 겁을 집어먹고 머뭇거리는 털이를 재촉하여 살같이 달려온 것이다.
그들은 늘 하는 대로 절문 안에 들어와서 마굿간에 말을 매고 주만은 걸어서 석가탑을 찾아 올라갔다.
"아까 그 여자가 웬 여자일까. 그 어여쁜 얼굴에 수색이 가득하였으니."
주만은 종시 그 여자가 마음에 키이는 모양이었다.
"글녓시오. 그 맨드리 하며 얼굴 판국 하며 어쩐지 서라벌 여자 같지는 않던뎁시오."
"얼굴 판국이야 서라벌 여자나 외처 여자나 구별하기가 어렵지만, 딴은 그 머리 쪽찐 것하고 어딘지 시골 티가 나기는 나더라. 그는 그렇다 해도 세상에 그렇게 결곡하고 고운 얼굴이 또 있을까."
"원 아가씨는 한 번 본 그 여자에게 아주 홀리셨군요. 아가씨가 사내 같으시면 여간이 아니실 뻔하셨군요, 호호."
털이는 또 버릇없는 소리를 하고 낄낄대었다.
"내가 만일 남자가 되었던들 그런 여자를 아내로 삼았겠지. 어여쁘고 안존하고 보드랍고…… 호호."
주만은 입에 침이 없이 칭찬을 하면서도 어이없다는 듯이 웃었다.
"참 아가씨가 남자로 태어나셨더면 동동 뜨는 서방님이 되셨을걸. 지금 본 그 여자가 아무리 아름답기로 아가씨께야 발밑에나 따라올깝시오."
"얘가 또 종작없는 소리를 지껄이는구나. 나 보기에는 여자답기에는 나보다 그 여자가 몇 곱절 나을 것 같더라."
"원 아가씨도, 아가씨를 어떻게 그런 여자와 댄단 말입시오."
이런 수작을 주고받을 제 그들의 걸음은 꽤 석가탑에 가까워 왔는지 자그락자르락 고이고이 돌을 미는 소리가 들리었다.
"오늘 밤에도 여상스럽게 일을 하시고 계시는구나."
주만은 하던 수작을 그치고 귀를 기울이다가 가만히 소곤거렸다. 마치 미묘한 풍악이 들려 오는데 그 털끝만한 가락이라도 귀 너머로 놓치지 않으려는 것처럼.
"아가씨는 귀도 밝으시어. 참 쥐가 밤톨이나 갉아 먹는 듯한 소리가 가느닿게 들려 오는뎁시오."
털이도 손으로 귀 뒤를 잡아 쫑긋 세우고 종알거리었다.
주만은 손을 저어 아무 소리도 말라는 뜻을 보이고 잠깐 걸음을 멈춘 채 이윽히 엿듣고 있었다. 달 그림자 어린 그 얼굴은 황홀하게 빛났다.
"너 저 자지러지는 가락 소리를 들어 봐라. 저절로 신이 나는구나."
"쇤네 귀에는 자그럽기만 한뎁시오."
"네까짓 귀가 귀냐. 저 소리는 가슴정질 하는 소리란다."
"녜, 그럽시오."
털이는 그럴싸하게 고개를 끄덕끄덕하다가,
"정에도 가슴정, 다리정이 있는갑시오, 오호호."
"무슨 방정맞은 웃음이냐. 그 흐무러진 가락을 고만 놓쳐 버렸구나."
"어서 가기나 하십시오. 그 탑 밑에 가시면 귀에 신물이 나도록 들으실걸."
하고 털이는 제가 앞장을 서서 종종걸음을 치려 들었다. 털이는 돌 쪼는 소리보다 제 아가씨를 한시바삐 모셔다 놓을 데 모셔다 놓고 차돌이 만나러 가기가 급하였던 것이다.
주만은 털이를 따라 멈추었던 발을 떼어는 놓았으나 땅이나 꺼질 듯이 가만가만히 걸었다. 제 귓속에 스며드는 아름다운 가락을 깨칠까 두리는 듯. 털이는 달음박질이라도 하고 싶은 것을 억지로 참으며 고 앙바틈한 다리를 아기작아기작 놀리어 제 아가씨의 본을 떠서 발소리를 죽이느라고 조심조심하였다.
"가슴정이란 어떻게 생긴 것입시오."
털이에게는 입을 다물고 묵묵히 있는 것처럼 거북한 노릇은 없었다.
"원 그 애는 가슴정이란 말이 그렇게 이상스러우냐. 가슴정이란 아주 돌을 곱게 다듬는 데 쓰는 게란다."
주만은 성가시나마 아사달에게 들은 풍월을 설명해 주는 수밖에 없었다.
그들의 눈앞에 나타난 석가탑은 다 된 탑이었다.
찢어지게 밝은 달빛 아래 그 의젓하고 거룩한 모양은 환하게 솟아오르는 듯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