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35

어둠이 짙어지자 솟은 때 모르는 달빛이 백금과 같이 번쩍인다.
'세상에 출중한 여자도 있구나.'
아사녀는 그 여자의 훨신 편 날씬한 허리와 동그스름한 어깨판과 달빛에 아롱거리는 비단 옷자락의 무늬를 바라보며 일순간 제 비참한 경우도 잊어버리고 속으로 속살거리었다.
한 손으로 느슨하게 말고삐를 거사거리고 또 한 손으로 손잡이에 옥을 물린 채찍을 비껴 든 모양은 옛이야기 속에서나 빠져나오는 여장부를 생각나게 하였다. 옥충 등자는 새파란 불길이 이는 듯한데 맵시 있는 말이 하붓이 놓이어 가만히 멈춰 있는데도 항청항청 그네질을 하는 것 같다.
저만큼 말등에 거의 달라붙은 듯한 방구리 같은 여자가 쌔근쌔근하며 말을 채쳐 달려온다.
아까 같이 가자고 소리를 쳐서 앞선 이의 말을 멈추게 한 여자이리라.
거의거의 따라서게 되자 뒤떨어졌던 이는 할딱할딱 숨이 넘어가는 듯하다가 그래도 연방 종알거리었다.
"애구, 아가씨도 아무리 급하시기로, 애구 아가씨도 아무리 아사달 서방님을 만나시기가 급하시기로 그렇게 그렇게 급하게 가신단 말입시오. 이 털이년을 죽으라면 그냥 죽으라시지."
아사녀는 저도 모를 사이에 소스라쳤다. '아사달 서방님'이란 말이 그의 귀를 칼로 에어 내는 듯한 까닭이었다.
"아사달님 말은 왜 또 이렁성거리느냐."
앞선 여자가 꾸짖는 듯이 한마디하고 말머리를 돌이켜 두 여자가 나란히 아사녀를 마주보며 말을 놓아 지나간다.
아사녀의 핑핑 내어둘리는 시선 가운데 달빛을 안은 그 여자의 앞모양이 뚜렷이 나타났다.
뒷모양보다 앞모양은 약간 파리한 듯하였으나 그 얼굴은 황홀하도록 아름다웠다.
'이 여자!'
아사녀의 가슴속에서 무엇이 피를 뿜으며 부르짖었다.
'이 여자다! 아사달님의 사랑이 바로 이 여자다.'
아사녀의 눈에는 핏발이 섰다. 온몸은 설한풍에 휘몰리는 것처럼 와들와들 떨리었다.
그 여자도 지나치면서 유심히 아사녀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그리고 제가 데리고 가는 시비인 듯한 뒤따라온 여자에게 가만히 속살거리었다.
"세상에 어여쁜 여자도 있구나."
"글녓시오. 이만저만한 인물이 아닌뎁시오."
"저렇게 어여쁜 여자는 난생 처음 보겠구나."
하고, 그 여자는 또 한번 힐끗 돌아보았다.
두 눈길이 찡 하고 소리라도 낼 듯이 마주 부딪쳤다.
"웬 여자일깝시오. 이 어두울 녘에 길가에 혼자 섰으니."
"그야 누가 알겠니."
그러고 두 여자는 뚜벅뚜벅 말을 채쳐 지나갔다.
아사녀는 돌아서서 그들의 가는 곳을 안청이 튕겨 나오도록 바라보았다.
그들의 그림자는 불국사 절문 안으로 빨려 들어가듯 사라져 버렸다.
아사녀는 뿔이나 난 것처럼 제 선 그 자리에서 한동안 움직이지 않았다. 그러다가 마치 열에 뜬 사람 모양으로 불국사를 향하여 줄달음질을 하였다.
거의 불국사 문전에 다다르자마자 아사녀는 주춤 걸음을 멈추었다.
문은 어서 들어오라고 손짓이나 하는 듯이 훨씬 열리었고 그 말썽꾼이 문지기도 어디로 갔는지 보이지 않았다. 그대로 뛰어들어가도 아무도 막을 이는 없을 것 같다.
아사녀는 몇 걸음 걷다가 주춤 서곤 하였다. 절문을 등지고 몇 발자국 떼어놓다가 다시 돌아서곤 하였다.
뛰어들까말까!
남편 보고 싶은 마음과 분한 생각과 남편의 얼굴을 깎이우고 망신을 주게 될 걱정이 그의 조그마한 가슴속에서 세 갈래 네 갈래로 갈리어 대판 싸움을 일으킨 것이다.
얼마 동안 아사녀는 어쩔 줄을 모르고 망설이고 있는 판에 문득 등뒤에서 팔을 잡아 비틀도록 단단히 부여잡는 사람이 있었다.
아사녀는 돌아보고 질겁을 하였다.
거기는 콩콩이가 무서운 형상을 하고 서 있지 않은가.
언제든지 싱글싱글 웃는 듯하던 눈이 미친 개 눈처럼 번들번들 번쩍이고, 앙다문 입술은 발발 떠는데 게거품이 지르르 흐르는데다가 앞니빨이 반쯤 튕겨 나온 것이 갈 데 없는 아귀와 같았다.
이윽히 아사녀를 뜯어나 먹을 듯이 노려보다가 몇 번 안간힘을 쓰고 나서 제풀에 제 성을 풀며,
"킁 킁, 난 어디를 갔다고. 그림자못에 열 번은 더 나가 보고, 후유, 어쩌면 이 늙은것을 그렇게 애간장을 졸이게 한단 말이오. 난 물에나 빠져 죽은 줄 알고 어떻게 애를 켰던지. 여기를 올작시면 온단 말이라도 해야 될 것 아니오, 킁 킁. 어떻게 화가 나던지……."
콩콩이는 다시 너스레를 피우기 시작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