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29

경신은 덤덤히 무엇을 이윽히 생각하다가,
"그러면 기예 파혼을 해달란 말씀입니다그려."
하고 다시 한번 다지었다. 그 말소리는 어딘지 구슬픈 가락을 띠었다. 걸걸한 장부의 심장에도 손아귀에 들었던 보옥을 놓치는 듯한 애틋하고 아까운 정이 없지 않은 탓이리라.
"서방님이 초행을 오셨다가 창피를 보시느니……."
주만도 목이 메이었다. 이렇듯 의젓하고 훤칠한 약혼한 이를 만나자마자 갈리는 것이 슬펐다. 은인은 될 값에 척진 일이 없는 그이에게 괴로움을 주는 것이 서러웠다.
"사정이 정 그러하시다면……."
경신의 목소리는 침통하였다.
"우리가 부부는 될 수 없는 노릇. 그것만은 나도 단념을 하겠습니다."
"그러면 파혼을 해주신단 말씀인지."
"파혼이야 그렇게 급할 것 있겠습니까."
"날짜는 부둥부둥 닥쳐오는데 파혼을 하신다면 하루바삐 하시는 것이……."
주만은 빠득빠득 조르는 듯한 것이 미안스러워서 말끝을 흐리마리하였다.
경신은 황소의 울음 같은 큰 한숨을 화 내뿜었다. 그리고 깊은 생각에 잦아진 듯 한동안 말이 없다가 자상스럽게 다시 물었다.
"그런데 그 탑은 언제쯤 완성이 된답디까. 분명히는 모르겠지만 어림치고."
"아마 팔월 한가위 안팎으로 될 법하대요."
"그러면 아직도 날짜가 많이 남았습니다그려. 그 안에 또 무슨 일이나 생기지 않았으면 좋겠습니다만."
경신은 두 애인의 장래를 위하여 걱정까지 해주었다. 주만은 눈물이 나도록 고마웠다. 무던한 남자란 말은 미리 소문을 들어 알았지마는 이토록 점잖고 자상할 줄은 몰랐다. 웬만한 사내 같으면 그 말을 들었으면 펄펄 뛰고 빼쭉샐쭉하며 돌아서 버리거나 그렇지 않으면 되잖게 빈정거리고 놀려먹으려 들 것이거늘, 이렇게 정중하게 진국으로 동정까지 해줄 줄은 참말 뜻밖이었다.
"그런 염려까지 해주시니 저는, 저는……."
주만은 너무 억색하여 말을 잘 이루지 못하였다.
"나는 암만해도 그 간특한 금지가 무슨 일을 또 저지를까 싶어서 종시 마음이 놓이지를 않습니다. 하루바삐 탑이 끝이 나서 두 분이 서라벌을 떠나 버리셔야 될 터인데."
"저도 마음이 조비비는 듯합니다만, 어디 탑이 그렇게 뜻대로 속히 끝이 나야지요."
"저번 날 밤에는 그 아사달이란 이가 많이 다쳤을 테니, 또 며칠 동안은 일을 잘 못 했을 것이고……."
"서방님께서 곧 구해 내신 탓에 그리 많이 다치지는 않았던 모양이야요."
"그렇다면 만행입니다만, 그러고 아까 말씀하신 파혼은 고만두시는 게 좋을 듯합니다."
"네?"
주만은 경신의 말뜻을 잘 알아듣지 못하였다. 자기네의 사랑에 동정을 해주신다면서 파혼을 거절하는 것은 또 무슨 까닭일까.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첫째 내가 파혼을 한다면 늙으신 이손께서 적지 않게 언짢아하시고 기예 파혼하려는 까닭을 아시려 들 것 아닙니까. 그러니 그 좋으신 어른을 상심을 시키는 것이 마음에 불안 막심한 일이고, 둘째는 파혼이고 뭐고 해서 소문이 왁자지껄하게 나게 되면 두 분이 몸을 빼어 달아나시는 데도 적지 않은 방해가 될는지 모르지요."
"그러면 서방님만 창피하실 것 아녜요."
"내야 뭐 관계없을 것 같습니다. 정혼한 아내가 달아났다기로 얘깃거리가 될는지는 모르나 큰 탈이야 날 것이 없지마는, 파혼으로 말미암아 두 분의 일이 혹시 탄로라도 난다면 그야말로 큰일이 아니겠습니까. 그렇지 않습니까."
경신의 말은 차근차근하고도 어디까지나 정중하였다.
주만은 감격의 회오리바람 속에 몸을 부들부들 떨었다. 자기를 마다하고 다른 남자를 따라가겠다는 장래 아내를 이렇듯 곰살궂고 알뜰하게 두호하고 위해 줄 줄이야.
주만은 땅바닥에 그대로 꿇어 엎드렸다.
"고맙습니다, 참으로 고맙습니다. 이 넓으신 은혜를 어떻게 갚사올지."
경신은 깜짝 놀라는 듯 주만을 붙들어 일으키며,
"이게 무슨 일이십니까. 그 눅눅한 찬 땅바닥에. 고마울 게 무엇 됩니까. 사람이 목석이 아닌 다음에야 그런 애달픈 사정을 듣고도 모르는 체할 수가 있습니까."
주만의 눈에는 눈물이 글썽글썽 괴었다.
"아, 알 수 없는 건 사람의 운명!"
경신은 홀로 한탄하다가 주만을 돌아보며,
"자 이제 돌아가십시다. 밤바람이 너무 찹니다. 혹은 집에서 찾으실는지도 모르니."
둘은 또 아까 모양으로 사랑하는 부부처럼 어두운 밤길을 나란히 더듬더듬 걸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