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28

저 눈썹만한 달마저 아주 지고 나면 이 어스레하게 보이는 길조차 어두워지리라. 어서 할 말을 훨훨 해버리고 집으로 돌아가야 한다.
주만은 한 걸음 바싹 경신의 곁으로 다가들었다.
"저어, 마, 말씀 여쭙기는 어렵지만……."
하고 주만은 더듬거렸다. 경신은 제 장래 아내의 얼굴빛이 심상치 않게 긴장되는 것을 유심히 바라보았다.
"무슨 말씀이신지."
"저어, 파, 파혼을 해주실 수 없으실지……."
주만은 마침내 벼르고 벼르던 한마디를 뱉고 말았다.
"파, 파혼!"
하고 태연한 경신으로도 이 뜻밖의 불길한 말에 제 귀를 의심하는 모양이었다.
"저, 저는, 경신님을 모실 사람이 못 됩니다. 서방님과 백년을 같이할 아냇감이 못 됩니다……."
"그것은 무, 무슨 말씀이신지."
경신의 씩씩한 얼굴빛도 변하였다.
"저는, 저는 누구의 아내 노릇도 할 수 없는 운명을 타고났습니다. 제 마음의 구슬은 벌써 깨어지고 말았습니다."
주만의 말낱은 가느나마 여무지었다. 그의 숨길은 훌훌 불길을 날리는 듯하였다.
"구슬아기님, 구슬아기님! 무슨 까닭인지 자세히 일러주시오."
경신의 숨소리도 거칠어졌다. 이렇듯 아름답고 깨끗해 보이는 장래 아내의 입으로 이런 말을 들을 줄이야.
행복의 꿈이 나련하게 막 온몸에 퍼지려 할 제 무참한 파탄이 뒷덜미를 짚을 줄이야.
"저번 때 서방님이 불국사에서 구해 주신 부여 석수, 곧 아사달이야말로 저의 마음을 바친 사람입니다. 서방님과 혼인말이 있기 전에, 서방님이 오시기 전에 저는 벌써 그이에게 백년을 맹세하고 말았습니다. 정혼이 되기 전에 아버지께 이 사정을 알리려고 여러 번 생각도 해보았으나, 완고한 아버지께서 제 말씀을 들어주시기는 천만 꿈 밖. 이 안타까운 비밀을 가슴속 깊이 간직해 놓고 서방님 뵈올 때만 고대고대하였습니다. 이 비밀을 알릴 데는 오직 서방님 한 분뿐……."
하고 호 하며 주만은 한숨을 내쉬고 나서 다시 말끝을 이었다.
"서방님께서 이런 줄을 아시고 저희들의 비밀을 어여삐 여겨 주셔도 좋고, 또 분노에 넘치시어 저를 한 칼에 베어 버리셔도 여한이 없으리라 결단하였습니다. 지금 아사달이 짓는 그 탑만 다 되는 날이면 저희들은 서라벌을 버리고 멀리 그의 고장인 부여로 달아날 작정입니다. 혼인날 전으로 세상없어도 그 탑을 끝내 버리고 저희들은 몸을 숨겨 버릴 작정을 한 것입니다."
하고 주만은 가쁜 숨길을 돌리었다.
경신은 입을 쭉 다문 채 제 장래 아내의 불 같은 하소연을 들으며 새록새록이 놀랐다.
달은 아주 넘어가 버리고 캄캄한 어둠이 그들의 둘레를 진하게 진하게 휩싸 버리었다.
경신의 눈앞에 번쩍이던 행복의 광채도 사라졌다. 야릇한 검은 운명의 구름장이 겹겹이 앞길을 막는 듯하였다.
"그날 밤만 하여도 만일 서방님이 아니시더면 아사달의 목숨은 벌써 없어진 것. 설령 목숨은 붙어 있다 하더라도 그 못된 금성의 일파에게 붙들리어 갖은 망신을 다 당하고 어느 지경에 갔을는지. 태산 같은 그 은혜를 생각한들 저는 서방님을 속일 수 없었습니다. 기일 수 없었습니다. 아무것도 모르시고 초행을 오셨다가 소위 신부가 도망을 하고 없으면 서방님 모양이 무엇이 되겠습니까……."
"금성이가 왜 아사달인가 하는 그 석수를 미워합니까. 무슨 그런 곡절이 있습니까."
경신은 어색한 제 처지도 잊어버리고 사건 자체의 흥미에 차차 끌리는 모양이었다.
"사실인즉 아무 까닭도 없습니다. 다만 그 금성이가 저한테 청혼한 것을 거절했을 따름입니다. 어찌 알았던지 저와 아사달의 관계를 눈치채고 그날 밤에도 들이친 것입니다. 말하자면 제가 거기 있는 줄 알고 망신을 주자고 한 노릇 같습니다."
경신은 고개를 끄덕이며,
"저런 못된 자가……."
하고 자기 일같이 분해한다.
"그런 줄 알았던들 그날 밤에 그대로 돌려보내지를 않았을 것을."
"그만큼만 해두셔도 적이 사람 같으면 인제는 그 못된 버릇을 고쳤겠지요."
"글쎄올시다, 워낙 그 부자란 못된 자들이라, 무슨 앙심을 어떻게 먹고 또 우리 두 집에 해를 끼칠지 모르지요."
"서방님께서 저희들 때문에 괜히 그런 자들과 척이 지시고!"
주만은 미안해하였다.
"그까짓 군이야 백 명과 척이 진들 무슨 상관이 있겠습니까마는, 늙으신 이손과 구슬아기님을 무슨 못된 꾀로 또 모함을 할는지."
"그는 그러하거니와 서방님, 제 청을 들어주실는지……."
하고 주만은 어둠 속에도 경신의 얼굴을 눈으로 더듬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