팔월 초승달은 은고리 모양으로 임해전 꼭대기에 비스듬히 걸리었다. 궁 안 언저리 하늘에 뿌연 무지개 같은 기운이 훤하게 떠오르는 것은 횃불, 화톳불, 초롱불이 휘황한 탓이리라. 그러나 드높은 궁장 밑은 으슥하게 어두웠다.
아까부터 경신과 주만은 아무 말 없이 어슴푸레하게 보이는 길을 겨우 발로 찾으며 나란히 걸었다.
만일 누가 보았다면 정겨운 남녀 단둘이 애달픈 사랑이나 속살거리는 줄 알련마는, 서울 한복판에도 후미진 골이라 인적도 드물었다.
그렇게 도지게 먹고 또 먹은 마음이건만, 주만은 어안이 벙벙하여 어디서부터 말을 끄집어내어야 옳을지 갈래를 잡을 수 없었다.
출렁출렁 안압지(雁鴨池)의 물결치는 소리만 새어들려도 까닭 없이 마음이 울렁울렁하였다.
경신은 경신대로 웬 영문인지 알 길이 없었다. 아무리 정해 놓은 아내이지만 초대면하던 말에 가만히 만나자는 것부터 이상스러웠다. 그 얼굴찌와 말씨와 몸가짐으로 보아 털끝만치라도 딴 의심을 품을 수 없는 것이 더욱 수수께끼였다. 그렇다고 그 간절하고 조그마한 청을 물리칠 수도 없었다. 저렇듯 뛰어나게 아름다운 장래 아내와 거닐어 보는 것도 그리 싫지 않은 구실이었다.
물론 선선히 승낙하였다. 첫눈에도 주만이가 그의 꿈꾸는 아냇감으로 모든 자격을 갖춘 것 같았다. 행복의 꽃구름 속에 쌓인 듯한 그는 승낙을 한 뒤에도 적이 호기심이 움직이기는 하였지만 조금도 불길한 생각은 들지 않았다. 오히려 주만이가 한결 더 정다워지는 듯하였다. 이 꽃다운 약속이 그에게 더 자지러진 기쁨을 갖다 줄지언정 손톱만한 슬픔인들 실어 올 리가 있느냐.
언약대로 만나기는 만났는데 그 '여쭐 말씀'이란 과연 무엇일까. 벌써 활 반바탕 거리는 더 걸었겠거늘 종시 말이 없으니 웬 까닭일까. 그렇게도 하기 어려운 말일까…….
경신은 차차 갑갑증이 났다. 더구나 고개를 다소곳하고 자기 옆을 따르는 주만의 뺨 언저리가 은은한 달의 원광에도 옥으로나 새긴 듯이 빳빳하게 움직이지 않는 양이 단단한 결심이나 깊은 수심에 잦아진 듯하여 그의 햇발같이 밝은 가슴에도 흐릿한 구름 흔적을 던져 주었다.
침묵은 갈수록 답답해졌다.
경신은 주만의 말하기를 기다릴 것 없이 자기가 먼저 이 답답한 침묵을 깨뜨리려 하였다. 그러나 호방한 그도 어쩐지 목이 닫혀진 듯 얼른 말이 잘 나오지 않았다.
그들의 발길은 안압지를 에두른 궁장 옆으로 왔다.
어느결에 달은 그 까마득한 담을 넘었는지 선들선들 이는 맑은 바람을 따라 눈보라처럼 그 은가루를 휘날린다.
못가라 그러한지 축축한 기운이 한결 더 옷깃으로 선뜩선뜩 스며드는 듯.
"날이 제법 선선해졌군요, 이제!"
경신은 마침내 말허두를 잡았다.
"네, 그래요. 벌써 팔월……."
주만은 경신이가 먼저 말을 끄집어낸 것을 매우 반기는 듯하다가 이내 목소리를 떨어뜨리며,
"그러면 팔월 한가위도 인제 며칠 남지를 않았지요."
하며 달빛을 덤썩 안은 경신의 얼굴을 우러러본다.
"뭘요, 아직도 초승인데 열흘은 더……."
하다가 경신은 빙그레 웃었다. 그는 언뜻 자기네들 혼인 날짜가 팔월 스무날로 작정된 것을 생각함이리라.
주만은 불쑥 나오는 말에,
"고까짓 열흘……."
하고 무참한 듯이 말을 끊어 버렸다.
'내가 왜 악정 비슷하게 이분께 이런 말을 할까. 이분께는 아직 우리의 비밀을 알려 드리지도 않고…….'
"그러면 그 열흘이 멀단 말씀입니까, 가깝단 말씀입니까, 어허허."
경신은 기탄없이 크게 웃으며 주만의 얼굴을 내려다보았다. 아까 그의 가슴에 얼진하였던 구름 그림자는 벌써 가뭇없이 사라졌다. 아름다운 장래 아내의 까닭 붙은 한마디도 그의 귀에는 거슬리지 않을 뿐인가, 기름같이 미끈하게 지나가고 만 것이다. 수줍은 듯 고개를 숙이고 망설이는 아냇감을 눈에 넣어도 아프지 않을 것 같았다.
'이때다, 이때다.'
주만은 속으로 부르짖었다.
'이때야말로 이분께 모든 사정을 얘기해야 한다. 모든 비밀을 알려 드려야 한다.'
주만은 용기를 가다듬어 숙였던 얼굴을 번쩍 들었다.
담 밖에 인기척에 놀람인가, 달빛을 샐녘으로 속음인가, 무슨 새인지 푸드득 날아오르는 소리가 바로 임해전 석가산 어림에서 그윽이 들리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