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래 사위라도 유만부동, 외동딸에 외동사위, 웬만해도 살갑고 귀여운 정을 금하지 못하려든, 세상에 다시 없는 배필을 구했거니 생각하는 어버이의 마음은 얼마나 즐겁고 기쁘고 전지도지할 것이랴. 아무리 융숭하게, 아무리 중난하게 대접을 하고 또 하여도 그래도 미진한 듯 필경에는 안방에까지 맞아들이기로 하였다.
혼인은 이미 다 된 혼인이니 장래 장모님도 뵙고 장래 아내까지 상면을 시키는 것도 무방할 듯한 것이요, 그보다도 딸의 평일의 기상을 잘 아는 유종은 비록 자기 마음에 열 번 스무 번 든다 하더라도 주만에게 미혼전 신랑감을 한번 보여 두자는 생각도 없지 않았던 것이다. 설령 혼인말이 없는 터수라 하더라도 친구의 아우, 동지의 아우에게 연상약한 그들을 내외시킬 까닭은 조금도 없었다. 당나라 풍속, 당나라 예법이 물밀듯 밀려 들어오는 오늘날이지마는, 아직도 꽃각시〔花娘〕, 꽃서방〔花郞〕의 유풍을 버리지 않고 명절때로나 풍월당에서나 젊은 남녀끼리의 같이 노는 기회는 얼마든지 있음에랴.
주만은 결심을 한 바이지만 그래도 두근거리는 가슴을 억지로 누르며 별당에서 불려왔다.
어머니를 따라 방문을 열고 들어설 때 얼굴은 화끈 하고 달았으나 뜻밖에 가슴은 가을 호수처럼 가라앉았다.
"여보게, 저 애가 미거한 내 딸이라네, 어허."
아버지는 긴 수염을 한번 쓰다듬고 너그러운 웃음을 터뜨리며 어머니의 등뒤에 반쯤 숨은 주만을 눈으로 가리켰다.
"네, 네."
경신도 유종의 말에 웃으며 대답하고 벌써 좌정했던 몸을 기거를 하는데 그 눈길이 번개같이 주만의 뺨을 스쳐가는 듯하였다.
주만은 그 안광에 눌리면서도 슬쩍 보아도 그 너글너글한 뺨과 번듯한 이맛전과 쭉 일어선 콧대가 야무지고 뚜렷하게 눈 속에 꽉차는 듯하였다.
'과연 아버지 말씀과 같구나. 저분 한 분이면 금성이따위 백 명은 넉넉히 대적하시겠구나.'
주만은 속으로 생각하였다.
"다들 앉아, 앉아."
유종은 장래 사위와 딸을 번갈아 보며 앉기를 명하였다. 앉기를 기다려 정중한 목소리로,
"아까도 말했거니와 자네 댁과 우리 집안은 대대로 세의가 두터운 터, 더구나 나랏일에는 언제든지 한마음 한뜻으로 오늘날까지 힘을 아울러 왔지만, 자네 백씨는 벼슬을 버리고 나 혼자는 고장난명. 인제 조정에 간특한 무리가 차고 들에 유현이 없으니, 나날이 기울어 가는 이 국운을 어떻게 한단 말인가. 나는 벌써 늙고 병든 몸, 자식이라고는 저것 하나뿐. 후사를 부탁할래야 우리 집안에는 부탁할 사람이 없네그려. 오직 믿는 것은 자네 형제분뿐. 백씨도 벌써 늙으셨으니 이 막중대사를 맡을 이는 오직 연부역강한 자네뿐이란 말일세……."
유종은 예까지 말하고 숨이 가쁜 듯이 말을 잠깐 끊었다.
잠자코 듣고 있던 경신은 자리를 피하여 절하며,
"저같이 나이 어리고 아는 것이 없사오니 어찌 그런 막중대사를 맡을 수 있겠습니까. 세상이 넓으온즉 저절로 그 사람이 있을까 합니다."
그 말소리는 지극히 공손하나마 마치 큰 종 모양으로 주만의 귀를 잉잉 울리는 듯하였다.
"그 사람이야 많을수록 좋지마는 어디 사람 얻기가 쉬운가. 어서 일어나게, 일어나. 자네가 그렇게 겸양하면 이 늙은 내가 도리어 부끄럽네."
유종은 한탄하고 다시 주만을 돌아보며,
"아가, 구슬아가, 너도 잘 알아듣느냐."
주만은 몸을 흠칫하며,
"네."
하고 모기 소리만큼 들릴락말락 대답하였다.
"왜 대답이 시원치 않으냐. 너는 장래에 이분을 홑으로 남편으로 알고 섬길 뿐만 아니라 우리 신라를 바로잡을 영웅으로도 섬겨야 하느니라."
주만은 그 자리에 엎드리고 말았다. 하도 억색하여 엉엉 목을 놓고 울고 싶은 것을 참고 떨리는 소리로,
"저, 저는 저는 감, 감당할 수 없습니다."
"응, 감당할 수 없어, 허허."
아버지는 딸의 말이 어리광 비슷하나마 이런 경우에 썩 잘된 대답인 줄 알아들었다.
"오늘 밤 얘기로는 내가 너무 지나쳤나 보다. 내가 있으면 도리어 불편하겠구나. 여보 부인, 뭐 밤참이나 좀 내시구려."
유종은 나가 버렸다.
사초부인은 음식 준비 하느라고 들락날락하게 되고, 주만과 경신이 단둘만 남아 있을 때가 많게 되었다.
주만은 아까부터 벼르고 벼르다가 필경 죽을 힘을 다 들여 입을 열었다.
"좀 청짜올 말씀이 있사온데……."
경신은 장래 아내가 먼저 말을 보내는 데 적지 않게 놀란 모양이었다.
"무슨 말씀이신지."
"내일은 정녕 떠나셔야 되실는지."
"뭐 꼭 갈 일은 없습니다마는……."
"그러시다면 내일 하루만 더 묵어 가시면 어떠하실지……."
"……"
"그렇게 하실 수 있다면, 내일 밤 술시 초쯤 되어 임해전 궁장 뒷길로 좀 뵈옵고 여쭐 말씀이 있습니다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