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19

아사녀는 맥이 풀린 다리를 절며 끌며 문지기가 가리켜 준 대로 언덕배기 흰길을 쫓아 내려갔다. 가고 또 가도 훤하게 뚫린 길은 꼬불꼬불 좀처럼 끝이 나지 않았다.
고생고생하여도 이런 고생이 또 있을까. 그만하면 하마 끝날 때도 되었건만 산은 넘을수록 높고, 강은 건널수록 깊을 뿐.
그렇게도 그립고 그렇게도 보고 싶던 남편을 지척에 두고 못 만나는 슬프고 애달픈 마음이야 여북하련마는 대공을 쉬이 끝내게 된다는 것과, 몸 성히 잘 있다는 소리만 들어도 얼마나 반갑고 든든한지 몰랐다.
이왕 고생길에 나선 다음에야 하루를 더하고 한 달을 더한들 어떠하랴. 그이의 대공에 조금이라도 누가 되고 폐가 된다면 문지기가 설령 선선히 들어준다 해도 그이를 굳이 만날 염의가 없지 않느냐.
삼 년도 참았거든 단 며칠이야 더 못 참으랴. 더구나 그이가 짓던 탑 그림자가 비치는 못이 있다고 하지 않느냐. 거울 같은 물 얼굴을 들여다보며 그 그림자를 찾아내는 것도 그리 작은 기쁨은 아닐 것 같았다.
이런 생각을 하고 아사녀는 고분고분히 불국사 문 앞을 떠난 것이었다.
다 된 물건의 그림자는 비치어도, 덜 된 물건의 그림자는 비치지 않고, 그 탑도 비치거든 다 된 줄 알라는 문지기의 마지막 말이 지금 당장이라도 그 탑 그림자나마 보기를 즐겨 했던 아사녀에게 새삼스럽게 타격을 주었으나, 다시 돌아서서 그 문지기와 실랑이를 할 기신도 없거니와, 문지기의 그 말 속에 깊은 뜻이 숨긴 줄을 몰라 들었다.
덜 된 물건이라도 그림자가 아니 비칠 리도 없을 것 같고, 설령 문지기의 말과 같다 할지라도 다 이룩만 되면 으레 그림자가 나타날 것이고, 또 그 그림자가 나타날 날도 멀지 않은 것을 아사녀는 믿었다.
십 리 안팎 길이 이다지도 멀고 지리할까.
아사녀는 시오 리도 넘어 왔거니 생각할 때, 그 줄기찬 흰길이 산기슭 모퉁이로 돌아가며, 쪽으로 그린 듯한 휘넓은 못이 길 위로 넘칠 듯이 떠보이었다.
못을 발견한 순간, 그토록 몹시 쑤시고 저리던 다리도 금세로 거뿐해졌다.
아사녀는 거의 줄달음을 치다시피 하여 못가에 다다랐다.
어느덧 해는 떨어져 어둑어둑해 오는 황혼빛에도 그 못물은 넘실넘실 아사녀를 반기는 것 같다.
아사녀는 못 언덕 풀밭에 펄썩 주저앉아서 한동안은 모든 것을 잊어버리고 물 얼굴을 들여다보기에 넋을 잃었다.
초가을 물 밑이 맑기는 맑았으나 어스레한 저녁빛이라, 수없는 검은 그림자가 일렁거렸으되, 어느 것이 어느 것인지 흐릿하여 뚜렷이 알아볼 수가 없었다.
그래도 아사녀는 희망을 잃지 않았다. 물 둘레가 이렇듯 넓고 못물이 이렇듯 맑으니 참으로 무슨 그림자라도 넉넉히 비칠 것만 같았다. 과연 그 문지기가 나를 속이지 않았구나 하며 몰풍스럽고 밉살맞던 문지기가 어떻게 고마운지 몰랐다. 그가 아니었더라면 누가 여기를 지시해 줄 것인가.
아사녀는 한시바삐 못 온 것을 한하였다. 조금만 일찍이 왔던들, 해지기 전에 왔던들 저 그림자들이 똑똑히 보였을 것을 원수엣다리가 지척거려 다 어두운 연후에야 대어 왔으니 어디 분간을 할 수가 있어야지.
'가만 있거라, 오늘이 며칠인가?'
그는 속으로 따져 보았다. 달이라도 있으면 오늘 밤에라도 알아볼 수 있으련마는, 그렇지 않으면 또 하룻밤을 밝히는 수밖에 없다.
그러나 그는 아무리 날짜를 따져 보아도 알 길이 없었다. 부여 있을 적엔 아사달을 기다리느라고 하루하루 가는 것도 손꼽아 헤아려 보았건만, 길을 떠난 뒤로는 몇 날 몇 달이 걸려도 서라벌에만 득달하면 고만이니 날 가는 것을 아랑곳할 일도 없었던 것이다.
아무튼 아사녀는 그 거물거물하는 많은 그림자 가운데 반드시 석가탑의 그림자도 가로누웠을 것을 믿고 의심하지 않았다. 다만 어두운 탓에 제 눈이 무디어 못 알아보는 줄로만 여겼다.
찰랑찰랑 밀려 들어오는 물결이 어떻게 살가운지 몰랐다. 손으로 한번 두번 움켜 보다가 문득 몇 달을 얼굴도 씻지 않은 더러운 계집이라는 문지기의 말을 생각하고 오래간만에 세수를 하기 시작하였다. 한번 손을 대고 보매 너겁이 켜켜이 앉은 때는 문적문적 일어났다. 씻고 또 씻어도 땟국은 줄줄이 흐르는 것만 같았다.
흥껏한껏 늘어지게 씻고 나매 온몸이 날 것같이 가뜬해지고 새로운 정신조차 돌아나는 듯하였다.
사내의 아귀떼를 막느라고 달포를 두고 때무겁으로 무장을 하였지만, 이젠 남편의 지척에 왔으니 그럴 필요는 다시 없었다.
깨끗한 몸과 마음으로 거룩한 대공을 이루신 남편을 뵈어야 할 것 아닌가.
아사녀는 못만 보아도 마음이 느긋하였다.
남편의 곁에나 있는 듯이 마음놓고 이내 고달픈 잠 속에 떨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