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돌이가 돌아간 후 주만은 골머리가 아프다고 애저녁부터 이불을 뒤집어쓰고 누웠다.
아아, 이상한 운명!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운명의 장난은 오밀조밀하다. 하고많은 날 가운데 하필 그날 그이가 용돌을 찾아가고, 하필 그날 금성이가 들이쳤던고. 하고많은 사람 가운데 하필 그이의 구원을 받게 되었던고. 은혜를 입게 되었던고.
그이가 아니고 다른 분이라면 무슨 수를 어떻게 하더라도 그 은혜의 만분지 일, 만만분지 일이라도 갚을 수 있지마는, 그이에게는 갚으려도 갚을 도리가 없지 않은가.
은혜를 갚기는커녕 그이에게는 원수가 될 이 몸이 아닌가. 그이가 장가를 오기 전에 나는 아사달과 달아날 사람이 아닌가. 아무것도 모르고 꾸벅꾸벅 초행을 왔다가 신부가 달아나고 없다면 신랑에게 그런 모욕이 또 있을까. 아무리 내가 나쁜 년이고, 매친 년이고, 죽일 년이라고 돌리더라도 그이는 그이대로 못난이가 되고 웃음거리가 될 것 아닌가. 이 몸이야 내가 지은 업원 때문이니 천참만륙을 당한들 한할 줄이 있으랴마는 그이야 무슨 죄가 있는가, 무슨 잘못이 있는가. 그야말로 못된 놈 곁에 있다가 벼락을 맞는 격이 아닌가.
생각할수록 경신의 처지가 딱하고 민망스러웠다.
전에라도 아버지께서 그렇게 좋아하시는 그이를 욕보이는 것 같아서 마음에 꺼림칙하지 않음이 아니었으나, 그래도 그때는 그와 나와 아무런 계관이 없던 터수가 아니었던가.
그러나 오늘날 와서는 그이는 아사달의 은인이요, 따라서 내 은인이 되지 않았는가. 비록 은혜를 갚지 못할 값에 도리어 그이에게 망신을 주고 창피를 주고 모욕을 준다는 것은 차마 못 할 노릇이 아닌가.
"아아 아사달님이 왜 하필 그이의 구원을 입었던고."
만 사람의 구원은 다 입어도 그이의 구원만은 입어서는 안 된다. 그이의 은혜만은 받아서는 안 된다.
그러나 어찌하리, 이왕 받은 은혜를 어찌하리. 지금 와서 주만이가 아무리 발을 동동 굴러 보아야 아무 쓸데없는 일이었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할까."
주만은 이불자락을 걷어치고 돌아누우며 소리를 내어 또 한번 뇌어 보았다.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생각은 개미 쳇바퀴 돌듯 그 자리에서 그 자리로 뱅뱅 돌기만 할 뿐이요, 다시 한 걸음 내켜지지를 않았다.
"암만해도 이 혼인은 물리쳐야 한다. 그이가 망신을 당하기 전에 파혼을 해버려야 한다."
이것이 그이에게 은혜를 갚는 오직 한가닥 길이 아닐 수 없다.
그러나 이것도 여간 어려운 일이 아니다. 어렵다느니보다 차라리 될 수가 도무지 없는 일이었다.
여간 응석과 말버둥쯤으로 아버지와 어머니를 조른다 해도 정혼이 다된 오늘날 될 성싶지도 않은 일이다. 그러면 아사달과의 사정을 저저이 고해 올리는 수밖에 없겠는데, 아버지께서 이 걸맞지 않은 사랑을 용서하실 리는 꿈 밖이요, 필경 아사달과 부여로 닫는 실낱 같은 희망조차 부서지고 말 것이다. 이쪽에서 파혼을 시키기는 동해바닷물을 말리기보다 어려운 노릇이다.
"그러면 저편에서 파혼을 하도록 할 수가 없을까."
주만은 발딱 일어앉았다.
그렇다, 저편에서 파혼을 하도록 하는 것이 무엇보다도 상책이다. 정혼된 것도 신랑집에서 파혼하려면 못 할 것이 아니다. 그렇게 된다면 신부가 망신을 당할지언정 신랑에게는 아무런 누가 없을 것 아닌가.
"그러면 어떻게?"
주만은 눈을 떴다 감았다 하며 한동안 생각에 잦아졌다. 그 맑은 눈동자에 이상한 광채가 반짝 하고 빛난다.
"내가 그이를 찾아뵈옵자."
주만은 마침내 마지막 결론을 얻었다.
아무리 어색하고 부끄러워도 내가 그이를 만나 보자. 우리의 사정을 낱낱이 일러 드리고, 혼인 못 할 내력을 알려 드리자. 아무리 이 몸은 깨끗하다 하더라도 마음의 정조는 벌써 깨어진 것. 어엿한 남편을 모시려도 모실 수 없다는 것을 직설거해 버리자. 한 칼로 수십 명을 휘몰아 내는 그이, 악한 놈들을 쫓고 옳은 이를 구할지언정 인명을 해치지 않는다는 그이, 영웅의 지혜와 도량을 가졌다는 그이가 아닌가. 사정만 듣고 보면 우리의 애달픈 사랑을 막지 않으리라. 안타까운 이 비밀을 끝까지 지켜 주리라. 너그럽게 모든 것을 용서하고 두말없이 파혼을 승낙해 주리라.
주만이가 이렇게 마음을 결단할 때는 벌써 밤이 환하게 밝았다.
미닫이에 부유스름하게 깃들인 새벽빛이 그의 어두운 운명의 길도 헤쳐 주는 듯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