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17

알뜰한 제 사랑 아사달이 절대의 위경에 빠졌을 때 표연히 나타나 그를 구해 준 이는 과연 누구이었던가. 그 중에 한 사람은 불국사에 있는 중이라 한즉 그 공은 갚을 수가 어렵지 않겠지마는, 그 중을 찾아온 손님이라는 또 한 사람의 근지가 더욱 알고 싶었던 것이다.
주만의 시선은 차돌의 입술에 맥맥히 몰리었다.
"소승도 분명히는 모릅니다마는 용돌 스님이 그 어른을 경신 서방님이라고 부르시더군요."
"경신 서방님?"
하고 주만은 깜짝 놀랐다.
"그러면 개운포(開雲浦)에 계시는 금량상 어른의 아우님이라더냐."
"글녓시오, 개운포 계시다는 말은 듣지 못했습니다마는, 그 어른 형님 되시는 어른이 전에 무슨 높은 벼슬을 지내신 분이신데, 지금은 시골서 많은 낭도를 모으시고 교훈에 힘쓰신다고 해요."
하고 차돌은 그 맑은 눈동자를 깜박깜박하며 마루를 내다본다. 털이의 간 곳을 찾는 모양이리라.
"경신 서방님!"
주만은 혼자말같이 또 한번 뇌었다. 그렇다면 갈 데 없는 금량상의 아우 경신이가 분명하다. 궁술과 검술에 놀라운 재주를 가지시어 '천하영웅'이라고 아버지께서 입에 침이 없이 칭찬하시던 그이가 분명하다.
그 형님이 다녀가시고 그분도 쉬이 온다더니만, 그분이 어떻게 그 밤에 마침 불국사에 나타나 금성 일파를 쫓아 버릴 줄이야.
운명의 장난이란 새록새록이 공교롭구나. 저와 정혼한 남자가 저의 애인을 구해 낼 줄이야.
주만은 끝없는 생각에 잦아지다가 뻔히 아는 노릇이지만,
"그래 지쳐 들어온 작자들은 누구라더냐?"
"금시중 댁 사람들이래요. 그래 후환이 무섭다고 주장 스님은 벌벌 떠시고, 그런 소문은 입 밖에도 내지 말라고 신칙이 여간 아니랍니다."
"그래 그 패에 다친 사람은 별로 없다더냐."
"왜요, 더러는 귀도 떨어지고 손가락도 떨어졌지만, 경신 서방님이란 그 어른이 인명은 해치지 말라고 용돌 스님에게 이르셨다니까요. 아무튼 세상에도 무섭고 인자한 어른인가 보아요."
"그래, 그 패들은 한 놈 떨어지지 않고 고스란히 다 달아났다더냐?"
"맨 마지막에 두 사람이 남았는데 그 중 한 사람이 그 댁 서방님이래요. 그 서방님이라는 이가 경신 서방님께 부복사죄를 하고 다시는 그런 일을 않겠다고 맹세맹세하였대요. 그리고 아사달님께도 코가 땅에 닿도록 절을 하고 사죄를 하였다니까요. 소위 행세하는 집 자식으로 그런 망신이 어디 있느냐고들 말을 하더군요."
차돌이가 계집애 모양으로 손으로 입을 가리우며 웃었다.
"아이 고소해라."
달아났던 털이가 어느 틈에 다시 들어와서 말참견을 하고 낄낄대었다.
"오, 아사달님께도 잘못하였다고 절을 하였어."
주만도 얼굴을 펴며 웃었다.
"금성인가 뭔가 망신살이 뻗쳤는뎁시오. 그전에는 아가씨께 그런 혼뗌을 하고…… 아이 고소해라, 오호호."
털이는 연방 재재거리며 한번 터진 웃음보를 걷잡지 못하였다.
"그래 절 안에서는 무슨 까닭으로 금성이가 쳐들어온 줄 아느냐."
"똑똑히는 모르는 모양입디다. 분명히 아시기는 용돌 스님과 그 어른뿐인데, 뭐 그 금성이라는 이와 혼인말이 있던 뉘 댁 아가씨가 석가탑 속에 숨은 줄 알고 쳐들어온 거라나요."
"그러면, 그러면……."
주만은 낯빛이 변해졌다.
"그러면 그 못난 금성이가 내 이름까지 주워섬겼을는지도 모르겠구나."
"글녓시오. 그건 소승도 잘 모르겠습니다마는 용돌 스님 말씀에 아가씨 말씀은 없으시던데요."
"저희들도 사람인데 설마 아가씨 함자까지 대었을깝시오."
"누가 아느냐마는 설령 내 이름을 대었다 한들 무슨 계관이 있겠느냐."
"아닙시오, 그렇다면 큰일입지요. 만일에 경신 서방님이 아셨다면 혼사가 터질 것 아닌갑시오."
"혼사가 터지는 게 그렇게 겁이 나느냐. 너는 내가 시집을 갈 줄 알았니."
하고 주만은 어이없다는 듯이 웃다가,
"그보다도 더 큰 일이 또 한 가지 생겼구나."
수수께끼 같은 말을 중얼거리며 무엇을 골똘히 생각하는 모양이었다.
그 동안에 차돌과 털이는 주만의 어깨너머로 슬쩍슬쩍 마주보다가 눈길이 서로 마주치면 피차에 고개를 숙이고 얼굴을 붉히었다.
아사달 신변에 또 무슨 다른 변이 생기지 않았고, 또 이렇다할 만한 전갈이 없는 것을 보면 차돌이도 털이와 마찬가지로 풋사랑의 안타까운 실마리에 끌려들어 며칠을 그리던 제 사랑을 찾아온 모양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