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102

금성은 정신이 번쩍 나는 것처럼 곧 창 밖을 향해 돌아앉으며,
"오, 고두쇠냐. 그래 어떻게 되었느냐."
입에 침이 없이 물었다.
"가만 좀 곕시오. 소인이 숨을 좀 돌려야겠습니다. 후후."
연해 가쁜 숨길을 내어쉰다. 방 안의 눈과 귀도 모조리 고두쇠의 입으로 몰리었다.
"그래 어떻게 되었단 말이냐. 갑갑하구나. 어서 말을 못 해."
금성은 연상 재촉을 하였다.
"후, 후, 서 서방님 황송합니다만 소인에게 술 한 사발만 내립시오. 첫째 목부터 좀 추겨야……."
"그래, 그래, 술부터 한잔 먹어야 하고말고."
텁석부리가 고두쇠의 말을 가로채며 눈으로 술을 찾다가 술 가지러 가던 놀이가 고두쇠의 말을 듣느라고 그대로 오도카니 서 있는 걸 보자,
"원, 그 술 내오기 참 어렵고나, 쩟쩟."
하고 혀를 찼다.
금성이가 그 말을 듣자 힐끈 돌아보고,
"요년 놀아, 왜 내오라는 술을 내오지 못하고 뭘 하고 거기 섰느냐, 매친 년 같으니."
놀이는 샐쭉하며 텁석부리를 흘겨보고 들어가더니 재빠르게 오지 소주병을 통으로 들고 나왔다.
"요년, 어서 따르지를 못해."
금성은 놀이가 술병을 들고 앉을 겨를도 없이 또 불호령을 하였다.
놀이가 술을 잔에다가 따르려는 것을 넘겨보고 고두쇠는,
"고 깍쟁이 잔에 따라서야 어디 간에 기별이나 하겠다고, 대접이나 보시기가 없나."
"원 오늘은 저것까지 말썽이야, 내 원 참."
놀이는 입을 삐쭉 하고 종알거린 다음에 행주질이나 친 듯이 비워 놓은 나박김치 보시기에다가 가뜩 부어서 내밀었다.
고두쇠는 받아서 단숨에 들이켜고 연방 카 카 소리를 치면서 두리번두리번 교자상을 넘실거리는 것은 안주를 찾는 것이리라.
"인제 어서 얘기를 해. 그래 주만이가 그 목장이를 지나가더냐."
"카, 카, 참 독한뎁시오. 빈속이 되어서 대번에 핑핑 내어둘리는뎁시오."
"이놈아, 주만이가 가더냐, 안 가더냐."
초조한 금성은 고래고래 소리를 질렀다. 좋은 안주나 얻어걸릴 줄 알고 말꼬리를 질질 끌다가 제 주인이 역정을 내는 걸 보고 고두쇠는 움찔해지며,
"녜, 녜, 곧 아뢰겠습니다. 소인이 분부대로 그 길목장이를 지켰습지요. 저녁도 못 먹고 해질녘부터 가서 지키는 게 밤이 되어요. 개미 한 마리 얼씬해얍지요……."
"그러면 오늘 밤도 또 헛다방이란 말이냐."
금성은 고두쇠의 말을 가로채며 시무룩해진다.
"아닙시오. 소인이 허기가 지쳐서 아무것도 눈에 잘 보이지를 않아 오늘 밤에는 구슬아가씨께서 행차를 않으시는 줄 알고 또 너무 기다리실 듯해서 그냥 들어올까 하였으나 죽을 작정을 하고 한참을 더 기다리고 있으려니 어디서 말발굽 소리가 들리겠지요."
"말굽 소리가? 그래서……."
하고 금성은 괴었던 침을 삼키었다.
"비호같이 소인 앞을 지나가는데 구슬아가씨가 분명하겠습지요. 어떻게 말을 잘 타시는지."
"뭐, 주만이가 지나가더란 말이냐. 네가 정녕히 보았더냐."
"보고말곱시오. 그 뒤에 털이란 년이 아치랑아치랑 따라가는 것도 보았는뎁시오. 만일 잘못 보았으면 소인의 눈을 빼어 바쳐도 좋습지요."
"그래 그게 참말인가."
텁석부리가 턱을 창 밖으로 내밀며 묻는다.
"참말이고말곱시오."
"자네, 배는 고프고 컴컴하니까 헛것이나 보지를 않았나."
"아니올시다. 이 눈으로 분명히 보았습니다."
좌중에는 잠깐 긴장한 빛이 흘렀다. 술과 음식이나 흥껏 한껏 며칠을 두고 더 얻어먹어야 될 판인데 오늘 밤으로 이렇게 속히 일거리가 걸릴 줄은 몰랐다.
'하필 오늘 내가 왜 왔던고.'
속으로 후회하는 위인도 한둘이 아니었다.
금성은 주만이가 밤이면 불국사에 드나드는 듯하다는 말을 고두쇠에게 듣고 그 이튿날부터 고두쇠를 거의 밤마다 불국사에 보내어 염탐을 시키었다.
부여 석수장이와 무슨 짬짬이속이 적실히 있는 듯하다고 고두쇠가 여러 번 장담을 하였지만 그래도 하늘의 별보담 더 높게 아는 주만이가 그 따위 시골뜨기 석수장이하고 정분이 나리라고는 꿈에도 생각 못 할 일이기 때문이었다.
그러나 나중에는 능청맞은 고두쇠가 말을 보태어 그 석수장이와 주만이가 탑 속에서 끼고 누운 것까지 분명히 보았다는 바람에 금성은 펄펄 뛰고야 말았다.
주만이가 어느 날 밤 아사달을 작별하고 사다리를 내려서다가 보고 놀란 수상한 그림자의 정체는 기실 이 고두쇠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