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96

주만은 불국사 가는 길에 금성의 하인 고두쇠에게 들킨 것도 뜻밖이거니와 고두쇠도 불국사엘 갔다 온다는 말에 적지 않게 가슴이 울렁거리었다.
"불국사에는 무슨 일로 갔다가 오는고."
주만은 조금 다심스럽다 싶으면서도 아니 물어 볼 수 없었다.
"네, 다름이 아니오라, 서방님께서 모레 유두놀이를 불국사 연못에서 차려 보시려고 지금 그 형편을 알러 갔다가 오는 길입니다."
"응, 그런가."
주만은 안심의 숨을 돌리었다.
그때에야 털이의 말이 화화 가쁜 숨을 내뿜으며 들이닥치었다.
털이는 고두쇠를 힐끈 보자 주춤 발을 멈추며 대뜸 힐난조로 호령을 하였다.
"웬 사람이관대 총총하신 아가씨와 말이 무슨 말이야."
"허허, 털이아가씬가. 자네를 또 만나는 것도 적지 않은 연분일세 그려."
털이의 눈은 대번에 호동그래졌으나 말씨만은 총알 같았다.
"이 녀석이 웬 녀석이기에 이게 무슨 말버르장머리야. 아가씨가 계신데 무엄하게."
"녜, 녜, 아가씨께는 황송합니다, 헷헤."
털이는 주만을 돌아보며,
"이 녀석이 대관절 웬 녀석입시오."
"왜 저 금시중 댁 하인 고두쇠 아니냐."
"네, 그럽시오. 쇤네 눈은 정말 발새 티눈만도 못한뎁시오. 그 녀석을 못 알아보다니."
고두쇠는 오늘도 얼근하게 주기를 띤 모양으로 털이의 말을 받으며,
"왜 아니 그렇겠니. 알뜰한 내님을 몰라보다께. 자네 눈도 말씀이 아닐세그려."
"이 녀석이 입때도 그 버릇을 못 고쳤구나. 오늘 저녁에는 또 뉘 댁 담을 뛰어넘다가 졸경을 치고 달아나는 길인고, 으흐흐."
털이는 깔깔거리며 놀려먹었다.
"왜 내가 담을 뛰어넘었느냐. 앗게 아서. 자네는 날 보고 그러지 못하느니라. 사람의 연분은 모르는 게니라. 자네가 또 내 마누라가 되어 고 조그마한 몸뚱어리로 얼마나 아양을 떨지 아니."
"어규 이 녀석아, 모기내 다리 밑에 거지서방을 얻을 값에 너 같은 도적놈의 계집이 될 내가 아니란다."
"어디 두고 보자. 아가씨가 우리 댁으로 시집을 오시면 넌 갈 데 없이 묻어 올 거고 그러면 여불없이 내 계집이 되었지 별수가 있느냐. 그때는 누룽지를 치마꼬리에 차고 영감 영감 이것 잡슈 하며 발길에 밟히도록 나를 졸졸 따라다닐 것이."
"행여나 이 녀석아."
고두쇠가 철철 늘어놓는 바람에 털이는 미처 말을 빚어 내지 못하고 욕지거리만 한마디하고 말았다.
"행여나 그렇게 되면 좀 좋겠느냐 말이지. 사내란 낫살이 지긋해야 쓰느니라. 구수하고 알씸 있고……."
"쓸데없는 소리들 그만두고 어서 가자꾸나."
주만은 털이를 재촉하여 말을 채쳐 가던 길을 가려 하였다.
고두쇠는 주만이 앞에 와서 절을 또 한번 굽실 하고 얼마만큼 지나쳐 가다가 다시 돌쳐서서 씨근벌떡 뛰어온다.
"아가씨, 구슬아가씨, 소인이 잊은 말씀이 있습니다."
그래도 주만의 주종은 들은 체도 아니하고 그대로 달려가노라니 고두쇠는 연신 주만을 부르며 허둥거리는 다리로 죽을 판 살 판 쫓아온다.
주만은 필경 말을 멈추었다.
"그까짓 녀석 따라오거나 말거나 왜 말을 멈춥시오."
털이는 상판을 찌푸리었다.
고두쇠는 거의 구르는 듯이 줄달음질을 쳐서 대어 선다.
"어유 후, 후, 숨차……."
"누가 저더러 뛰어오랬나, 쩟."
털이는 외면을 하며 혀를 찼다. 고두쇠에게 말은 모자라고 놀린 것이 분해서 견딜 수 없었다.
고두쇠는 연방 숨을 후후 내쉬며 주만의 발 옆에 와서,
"여쭙기 황송하오나 이번 유두놀이에 아가씨께서도 꼭 행차를 해줍시사고 서방님께서 분부가 계셨습니다. 내일 소인이 청 쪼으러 올라가겠습니다만 뵈온 김에 미리 여쭈어 드리는 것입니다."
"글쎄 마침 가게 될지 보아야."
"아닙시오. 꼭 오셔야 하십니다. 소인 댁 아가씨도 가실 테고 여러댁 아가씨들도 많이들 오신다니 꼭 오셔야 됩니다."
주만은 딱 거절을 해버리자니 고두쇠의 잔소리가 듣기 싫고 그렇다고 마음에 없는 일을 승낙도 할 수 없어 아무 대꾸도 하지 않았다.
"아무튼 꼭 오실 줄 알고 소인은 물러갑니다."
의외에 고두쇠는 선선히 물러갔다.
"그런 귀찮은 소리나 들으시려고 아가씨는 왜 말을 멈춥시오."
털이는 주만을 원망하였다.
"아니다, 그냥 자꾸 가면 그자가 불국사까지 따라올 것 아니냐. 아무튼 그자가 우리의 행색을 눈치를 채었을 테니 앞으로 성가신 일이나 생기지 않을지."
주만의 얼굴은 불길한 예감에 흐리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