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님이 드셨으니 오늘 밤에는 마님이 못 오시겠구나."
주만은 오래간만에 빠져나갈 기회가 온 것을 몰래 기뻐하였다.
"혹시 오실지 누가 알아요. 더구나 오신 손님이 아가씨 시댁 어른이시라니 아가씨를 불러 보시게 될는지도 모르지 않아요."
털이는 벌써 주만의 속을 들여다보고 미리 방패막이를 하려 들었다.
"그 애는 별소리를 다 하는구나. 시집도 가기 전에 시댁 어른이 다 무에냐."
"그래도 서두시는 걸 보아서는 정혼이 꽉 된 듯싶은뎁쇼."
"정혼이 되었기로 설마 장래 시아재비 될 어른을 날더러 보라고야 하시겠니. 더구나 앓고 나서 얼굴이 반쪽이 된 나를."
"아가씨 말씀도 그럴 성싶지만 혹시 찾으실지 모릅지요."
"얘, 그런 염려는 작작 하고 말과 초롱이나 미리 준비를 해두어라. 오늘 저녁에는 세상없어도 불국사엘 가야겠다."
"에구 거길 또 가시鲳쇼. 저번 때 그렇게 혼이 나시고도. 그야 말짝으로 물에 빠진 새앙쥐 꼴이 되고 그 먼길을 오는데 쇤네는 하마터면 죽을 뻔을 했는뎁쇼. 아가씨께서는 말경에 병환까지 나시고……."
"얘, 누구는 모르느냐. 왜 또 지절거리느냐. 잔말 말고 시키는 대로나 하려무나. 소풍차로 휘 한 바퀴만 돌아 올 테니……."
"그럼 오래는 걸리지 않을깝쇼. 오늘도 어째 일기가 흐린 듯한뎁쇼."
"오래가 다 무에냐. 잠시 갔다가 선길에 돌아올 텐데."
실상 주만이도 불국사에서 오래 얼무적거리리라고는 생각지 않았다. 흉중에 맺히고 서린 것은 저번에 다 털어놓았으니 그이를 만난다 한들 이젠 할 말도 없거니와 할 일도 없지 않으냐. 안타까운 그이의 모양을 한번 힐끈 보기만 하면 그만이다. 그리고 언제쯤 서라벌을 떠단다는 것만 알면 그만이다.
밤 들기가 무섭게 주종의 말머리는 불국사로 향하였다.
찌는 듯하던 더위도 들 밖엘 나오니 선선하게 누그러지는 듯하였다.
어둑한 비탈길을 말을 채쳐 달리매 주만은 훨훨 날듯이 몸이 가뜬해짐을 느끼었다. 아직도 끈적끈적하고 남아 있던 감기 기운도 씻은 듯 사라지고 말았다. 화하게 트인 코 안으로 신선한 공기는 물처럼 들어왔다.
한참 신이 나게 말을 채쳐 달리다가 산모퉁이를 돌아서는 목장에서 땀을 드리우며 뒤떨어진 털이 오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촛불을 켜도 좋을 만큼 어둡기는 어두웠지만 지나치는 사람을 잘 아는 사람이면 모습으로 어슴푸레하게 짐작은 할 수 있는 어둠이었다.
그때 헙수룩한 행인 하나가 마주 내려온다.
무심코 주만의 앞을 슬쩍 지나치다가 그 행인은 별안간 무엇을 생각한 듯 어둠 속에 외따로 말을 세우고 있던 주만을 수상쩍다는 듯이 치훑고 내리훑고 보고 또 보았다.
'도적이나 아닌가.'
주만은 언뜻 이런 생각을 하고 등에 찬 소름이 쭉 끼쳤으나 저는보행이요 나는 말을 탔으니 사불여의하면 그대로 달려가면 그만이라고 마음을 작정하고 세상 오지 않는 털이를 그대로 기다리고 있었다.
그 행인은 기연가미연가하는 듯이 고개를 기우뚱기우뚱하고 있는데 주만이도 어쩐지 그 행인의 모습이 어디서 한번 본 듯싶었으나 얼른 생각이 잘 돌아나지를 않았다. 그 무렵이었다.
"아가씨! 애규, 애규."
하고 털이의 부르는 소리가 들려 왔다. 아직도 서너 간통이나 떨어져서 털이가 쌔근발딱거리며 쫓아오는 꼴이었다.
그러자 그 행인은 문득 주만의 말머리 앞으로 다가서며 굽실 하고 절을 하였다.
"소인이 눈이 무디어 죽을 죄를 졌삽니다. 여쭙기 황송하오나 구슬아가씨가 아니시온지."
주만은 후미진 길에서 수상한을 만나 마음이 적이 오그라붙는 판인데 저를 안다는 것이 얼마쯤 다행한지 몰랐다.
"그래 자네는 뉘 댁에 있는가."
주만은 그 말투와 행동으로 보아 아는 집 하인인 줄 짐작하고 이렇게 물어 보았다.
"녜, 언젠가 한번 뵈온 적도 있습니다마는, 소인은 금지 금시중 댁에 있사옵고 천한 이름은 고두쇠라 부르옵니다."
주만은 속으로 옳거니 하였다. 금성이가 담을 넘으려다가 톡톡히 망신을 당하던 때에 데리고 왔던 하인인 줄 인제야 깨달았다.
"이 어두운 밤에 어디로 행차를 하옵시는지."
고두쇠는 눈알을 두리번두리번 굴리며 주만의 가는 곳을 물었다.
"응, 나는 잠깐 볼일이 있어 가네마는, 자네는 어디를 갔다가 이렇게 저물게 오는가."
"불국사에까지 갔다가 다녀오는 길입니다."
"불국사!"
하고 주만의 가슴은 뜨끔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