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89

빨갱이는 저녁 공양을 먹고 나서 여러 중들과 한동안 잡담을 하다가 땅거미가 어슬어슬 든 뒤에야 제 처소로 돌아왔다.
처소라고 해야 조그마한 방 한 간이 후미진 산기슭에 외따로 떨어져 있는 것이었다.
그는 제 방에 돌아오면 늘 하는 버릇으로 성가신 듯이 칡베 장삼을 벗어던져 버리고 홀가분하게 몸단속을 차린 다음에 벽에 걸어 둔 긴 환도를 떼어 들고 나섰다.
총총하게 늘어선 나무틈을 비집고 발이 푹푹 잠기는 우거진 풀을 헤치고 한동안 올라가면 산허리 채 못 미쳐서 펀펀한 터전이 나타난다.
호랑할미꽃과 떡갈나무가 겅성드뭇한 사이에 여기저기 주춧돌이 나동그라진 것을 보아 아마 옛날 암자가 들어앉았던 자리인 듯.
빨갱이는 산이 쩡 하고 울리도록 큰기침을 한번 하고 나서 칼을 쓱 뽑아 든다.
어둠침침한 가운데 칼날은 마치 한 가닥 얼음과 같이 번득인다.
엄지와 식지로 서슴지 않고 칼날을 잡아 쭉 훑어 보아 날과 이가 빠지거나 상하지 않은 것을 가늠하고 만족한 듯이 머리 위에 빗겨 든다.
그의 석후의 기운부림, 곧 검술공부가 시작된 것이다.
빨갱이의 본명은 용돌(龍乭)로 무슨 까닭이 있어 입산을 하였을망정 언제든지 화랑시대가 그리웠다.
비호같이 말을 달리며 산으로 들로 사냥을 다닐 때 귓결에 울며 지나치던 바람은 얼마나 시원하였던가. 활쏘기 칼겨룸에 목숨을 내던지는 싸움은 얼마나 호장하였던가. 주사청루를 휩쓸고 뛰고 굴리던 맛은 얼마나 통쾌하였던가.
나는 소리도 무대 같은 목탁을 두들기는 것도 신풍영스럽고 손끝에 몬틀몬틀한 염주를 헤이기는 더구나 고리타분하였다. 옷까지 몸에 척 어울리지를 않고 따로 돌아, 장삼 소매는 아무리 휘저어 보아도 거추장스럽기만 하였다.
하루에도 몇 번을 중생활을 그만두고 산을 뛰어나갈까 하였지마는 그래도 제가 맡은 소임이 무거움을 생각하고 꿀꺽꿀꺽 참노라니 심사가 절로 나서 불가에서 대기하는 소위 진심이 불길처럼 일어났다.
그러나 한해 두해 지나는 사이에 기가 꺾이고 또 꺾이고 결이 삭고 또 삭아서 요새 와서는 그리 못 견딜 지경은 아니로되 그래도 이따금 치받치는 울화를 걷잡을 길이 없었다.
심심하고 쾌쾌하고 울적한 빨갱이 곧 용돌의 일상생활에 오직 한개의 낙은 이 검술공부였다. 입산 수도하는 사람이 칼이란 천부당만부당한 것이로되 자기 집 대대로 내려오는 보검이요, 또 그가 애지중지 차마 놓지 못하는 칼이기 때문에 기어코 지니고 온 것이었다.
칼만 들고 나서면 모든 시름과 울화가 가뭇없이 스러지고 몸은 훨훨 나는 듯이 가뜬하다.
처음에는 사지를 풀 겸, 그는 관창(官昌)이 검무를 추어 고구려 왕을 죽이던 본을 떠서 칼춤부터 추기 시작한다.
한바탕 늘어지게 춤을 추고 나면 온몸에 땀은 비 오듯 하고 팔과 다리가 허뭇하게 풀어진다.
그 다음에는 칼겨룸을 시작하고 적진을 지쳐 들어가는 시늉, 적장의 머리를 가슴을 뜻대로 마음대로 이리 찌르고 저리 찌르고 마지막엔 한창 신이 오르면 칼을 휘두르는 손길은 번개와 같고 그의 온몸은 송두리째 칼빛에 휩싸이어 마치 한 덩어리 푸른 무지개가 바람에 휘날리는 것과도 같았다.
뒤로 물러섰다, 앞으로 내달았다, 저 멀리 외로이 선 늙은 소나무를 바라보고 풍우같이 몰아가기도 하였다.
오늘 밤에도 한창 신이 나서 칼을 잽싸게 휘두르며 애꿎은 그 늙은 소나무를 향하여 줄달음을 쳐 들어갔다.
문득 그 소나무 뒤로부터 검은 그림자가 얼진하는 듯하더니 난데없는 칼이 쨍그렁 하고 제 칼에 와서 마주친다.
용돌은 한 걸음 뒤로 물러서기는 섰으니 검술공부한 보람이 있어 그래도 그렇게 놀라지는 않았다.
"누구냐?"
소리를 가다듬어 물으면서도 이 뜻밖의 적수를 만난 것을 도리어 심심파적으로 기뻐하였다.
"……"
저편은 아무 대꾸도 없이 칼을 겨루며 한 걸음 들어선다.
"그래 나와 겨뤄 볼 테냐. 흥, 잘 만났다."
용돌은 코웃음을 치고 자신 있게 칼 끝을 그 검은 그림자의 가슴 언저리를 겨누고 날려 보았다.
저 칼과 이 칼이 한데 부딪치며 불이 번쩍 흩어지는데 저편의 칼이 너무 세차서 맞닿은 용돌의 칼이 퉁겨나며 칼자루 잡은 손목이 휘청 하고 제쳐지는 듯하였다.
그럴 사이에 저편의 칼은 수없이 용돌의 목과 가슴을 지나가건만 이상스럽게도 찌르지는 아니하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