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84

"그런데 여보게 큰일난 일이 한 가지 있네."
하고 싹불을 바라보는 팽개의 얼굴에는 이때까지 싱글벙글하던 웃음살이 걷히었다.
"아사녀의 마음이 아무리 나에게 쏠렸다 한들 죽어 버려서야 만사가 물거품이 될 것 아닌가."
"그야 다 이를 말이겠나."
"나는 아사녀의 이번 병이 어쩐지 심상치를 않은 것 같으이."
"원 나중에는 별소리를 다 듣겠네. 그래 이번 병으로 아사녀가 죽을 것 같단 말인가. 인제 겨우 스물을 넘어설까말까 한 귀밑이 새파란 계집이 한 이틀 앓는다고 죽어, 밥을 죽이지."
"아니 그렇게 말할 것도 아니거든."
"아닌 게 다 뭐란 말인가. 제 사내가 계집을 얻었다는 바람에 깡샘을 하고 생병이 난 것인데 며칠만 꽁꽁 앓으면 툭툭 털고 일어나겠지그려. 죽어, 왜 죽어. 더구나 자네 같은 한다하는 장래 서방님이 등대하고 곕신데."
"아닐세 아니야. 하룻밤 사이에 그 옥 같은 살이 쏘옥 내리고 곁에만 가 앉아도 단내가 혹혹 나니 몸이 얼마나 더우면 그렇겠나."
"아규, 왜 안 그러리. 알뜰한 고운 님이 파리해졌으니 뼈가 저리겠지. 이 쑥아, 어허허."
하고 싹불은 두 손으로 제 허리를 짚으며 간간대소를 한다.
"그렇게 우스개로 돌릴 것만 아니래도 그러네그려. 첫째 엊저녁도 안 먹었지, 오늘도 굶었지, 약을 지어다 주어야 먹지를 않지, 그러니 큰일이란 말이거든."
"젊은 때는 하루 이틀 굶어야 아무 상관이 없는 걸세. 계집이란 독이 나면 며칠씩 예사로 굶는 걸세. 독이 풀리면 누가 권하지 않아도 제 출물에 제 손으로 밥을 지어 가지고 아귀아귀 처먹는 법이라네. 우선 내 마누라만 해도 툭하면 굶기를 밥먹듯 하는걸 뭐."
하고 싹불은 팽개의 걱정이 같잖다는 듯이 천하태평이다.
"어디 세상 사람이 다 자네 부인 같은 줄 아나. 도대체 홀아씨로 앓아 누웠으니 미음이라도 끓여 주고 약이라도 달여 줄 사람이 있어야지."
"아따 아사녀가 어느새 그런 귀골이 됩셨던고. 제 배가 고파 보게, 그 짭짤한 솜씨에 혹닥혹닥 오죽 잘 해먹을라고."
"이런 사람은, 남의 말은 도무지 귀담아듣지 않네그려. 그렇지 않다 해도 왜 자네 말만 세우려 드나. 여보게, 그러지 말고 자네 부인께서 오셔서 며칠만 봐주셨으면 어떻겠나. 미안한 말이지만."
싹불은 말도 말라는 듯이 손을 쩔쩔 내저었다.
"안 되네, 안 되네. 자네 청이니 그랬으면 좋다뿐이겠나마는 그 고집퉁이가 들어먹을 것 같지도 않네. 일전만 해도 한 경을 자고 자네 혼자 기다릴 것이 딱해서 곧 되쳐서 오려니까 이 망나니가 갖은 바가지를 다 긁네그려. 사내자식이 뭐 할 게 없어 남의 홀아씨 사랑에서 수자리를 사느냐 마느냐. 아사녀가 뭐 그렇게 예쁘길래 수박 겉핥기로 실속도 없다면서 왜 미쳐 다니느냐. 그년이 본 여편네고 내가 샛계집이냐…… 별의별 소리를 다 해서 귀가 따가워 죽을 뻔했다네."
하고 싹불은 그때 제 여편네에게 혼뗌을 당한 것을 생각하고 진저리를 친다.
"허 말씨는 모두 한뽄이로군. 우리 왈패도 걸핏하면 내가 왜 샛서방질을 하느냐. 제 사내를 어엿이 못 데리고 있고 밤참 치르듯 하느냐고 잡아먹을 듯이 들어덤빈다네."
"좌우간 어서 귀정이 나야지. 정말 살이 내릴 지경이야. 암만 중언부언을 해도 세상 사람을 놓아 주지를 않기에 나는 하는 수 없이 우리 통속을 그럴듯하게 일러주고 겨우 빠져나왔다네."
"뭐 그러면 우리 속얘기를 부인께 까바쳤단 말인가. 그러다가 말이 나면 어떡하자고, 경망스럽기는……."
"아닐세, 그것 염려 말게. 우리 무대가 입이 무겁기도 철옹성이고 내가 다지기도 여러 번 다져 놓았으니……."
"그 말이 만일 왈패의 귀에 들어가는 날이면 죽기 한사하고 덤벼들 텐데…… 응, 찍찍."
팽개는 싹불의 다짐과 그 여편네가 입이 무겁다는 것을 도무지 못 믿겠다는 듯이 혀를 여러 번 찼다.
"그건 여불없네. 여불없대도 그 사람이 자꾸 뇌네그려."
필경 싹불은 짜증까지 내었다.
"그러나저러나 아사녀의 병구완을 어떻게 한단 말인고. 자네 부인도 올 수 없고, 내 왈패는 더더군다나 말할 나위도 못 되고 다른 아주먼네를 구해 두재도 소문날 게 무섭고…… 어, 실없이 큰일인걸."
팽개는 이맛살을 찌푸리었다.
"설마 내일쯤은 일어나겠지."
싹불은 종시 아사녀의 병을 대수롭게 여기지 않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