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82

제 목숨이 한시바삐 끊어지기를 바라는 아사녀이거니 팽개의 지어 온 약을 받기는 받을지언정 달여 먹을 리는 없었다.
먹지 않을 약이매 애당초부터 거절을 해버렸으면 그만이겠으되 남은 정성스럽게도 지어다 주는 것을 몰풍스럽게 물리칠 도리도 없거니와 더구나 팽개에게는 그렇지 못할 사정도 한두 가지가 아니다.
첫째 아버지가 돌아가신 뒤 어느덧 반 년이 겨웠는데 이나마도 살아온 것은 온전히 그이의 덕이 아니냐. 단 한 입이니 그리 많다고는 못 할지라도 나무랑 쌀이랑 반찬거리를 그이 아니면 어느 뉘가 돌보아 줄 것인가.
더구나 만일 그이가 아니었던들 그 감때사나운 제자들을 누가 제어를 할 것인가.
우선 작지의 흉행만 하더라도 그이가 때맞추어 뛰어오지 않았더면 어느 지경에 갔을는지 모른다. 다른 것은 다 그만두더라도 이 일 한 가지만도 그는 아사녀에게는 둘도 없는 은인이 아닐 수 없다. 그나 그뿐인가. 요새 와서는 자기의 집안 일을 다 버리고 오직 스승의 따님이란 까닭으로 수직까지 와서 해주는 그 갸륵한 정성! 아무리 세상이 넓다 한들 이렇듯 고마운 이는 또다시 없으리라.
그가 무슨 일이 있어 잠시 잠깐 다녀 나가는 뒷모습을 보고 아사녀는 마음속으로 '오라버니, 오라버니' 하고 몇 번이나 부르짖은지 모른다.
뼈와 피가 섞인 친동기간이면 이보담 더 자상스럽고 곰살궂으랴.
다른 사람 아닌 그이가 지어다 주는 약인데 안 먹을 때 안 먹더라도 어떻게 거절하랴. 만약 약까지 안 먹는다면 그이는 얼마나 더 슬퍼하고 애를 켤 것인가.
"뭐 화가 뜨시고 몸살 같으니 이 약만 쓰시면 곧 낫는답니다."
팽개는 다섯 첩을 한데 묶은 약꾸러미를 내어놓았다.
"약은 왜 또 지어 오셨어요. 곧 나을 것을……."
아사녀는 펄펄 끓는 몸을 반쯤 일으키려고 애를 쓰며 미안해하였다.
"얼른 곧 달여 잡수셔야 할 텐데……."
하고 팽개는 입맛을 쩍쩍 다시었다. 약 달일 사람이 없는 것을 걱정하는 눈치였다.
"고대 달여 먹어요."
"저렇게 기동도 옳게 못 하시는 이가 어떻게 약을 달이실 수도 없고!"
팽개는 연상 걱정을 하였다.
"아녜요. 이제 한숨만 자고 나면 몸이 풀릴 것 같애요."
아사녀는 제 병이 대단치 않다는 것을 알리려 하였다.
"실없이 중환이신데 주무시고 나신다 한들……."
팽개는 미심따운 듯이 생전 처음으로 아사녀의 얼굴을 바로 보며 머뭇머뭇하였다.
"한 경만 자고 나서 곧 달여 먹을 테에요. 제가 오라버니 말씀을 거슬릴 리야……."
하고 아사녀는 팽개의 근심하는 것이 민망하여서 가까스로 웃어 보이었다.
슬쩍 아사녀의 웃는 얼굴을 쏘아보고 팽개는 다시 얼굴을 외우시며 아주 진국으로,
"그럭저럭 다 저녁때가 되었는데 주무시고 나시면 밤중이 될걸."
"그러면 내일 아침에 달여 먹어도 괜찮지 않아요."
하고 아사녀는 어리광피듯 또 한번 상그레 웃어 보이었다.
"안 됩니다, 안 됩니다. 그래 가지고는 안 됩니다. 약이란 으레 주무시기 전에 잡수셔야 된답니다. 더구나 오늘은 왼종일 잡수신 것도 없고. 첫째 무에든지 잡수셔야 될 텐데."
"왼종일 안 먹기는요, 아침도 먹었는데."
아사녀는 난생 처음으로 거짓말을 한마디하고 말았다. 거짓말을 할지언정 제 은인으로 하여금 다시 저로 말미암아 걱정은 시키기 싫었던 것이다.
"아침 지으시는 기척도 없으시던데."
팽개의 말씨는 어디까지 점잖고 어디까지 공손하였으나 그 말도 어디인지 차차 무관한 가락을 띠어 온다.
아사녀는 조금 헤벌룸해진 옷깃을 여미었다. 여자의 본능으로 경계는 하면서도 말투는 저도 모를 사이에 팽개를 닮아 갔다.
"밥 짓기가 귀찮아서 식은 밥을 데워 먹고 말았지요."
하고 제 거짓말이 차차 늘어가는 것이 무안해서 열오른 얼굴을 더욱 붉히었다.
그 순간 팽개의 눈길은 병아리를 움키려는 독수리의 눈깔처럼 이상하게 번쩍이었으나, 아사녀가 제 무안에 겨워 마주치는 눈을 돌렸기 때문에 그 무서운 눈치를 놓치고 말았다.
만일 아사녀가 그 눈치를 보았던들 지금까지 그에게 올리던 감사가 대번에 스러졌으리라. 붙던 정도 뚝 떨어지고 진저리를 쳤으리라.
"자시기는 무얼 자시어, 허허."
팽개는 한번 엄벙하게 웃고 나서 다시 얼굴빛을 바루고,
"그 큰일인데."
하고 무엇을 잠깐 생각하는 듯하더니 벌떡 몸을 일으켜 밖으로 나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