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80

그 이튿날부터 아사녀는 몸져눕고 기동조차 못 하게 되었다. 머리는 쪼개는 듯 몸은 불덩이같이 달고 뼈 마디마디가 쑤시고 저리었다. 그의 마음의 병은 마침내 몸의 병을 이루고 만 것이다.
잠이나 들었으면 그 몹쓸 고통을 잊으련만 잠을 청하려 눈을 감으면 오라는 잠은 아니 오고 갖가지 무서운 환영이 그를 사로잡고 괴롭게 굴었다. 기껏 잠을 이룬대야 이내 가위가 눌리고 정체 모를 어마어마한 괴물이 가슴이 으스러지도록 그를 찍어눌렀다.
"윽, 윽."
하고 비명을 치는 소리가 분명히 제 귀에도 들리건만 얼른 잠이 깨이지 않아서 무한 애를 켠다. 그 괴물은 어느 때는 징글징글한 작지의 모양도 되어 보이고, 어느 때는 웃보, 장달, 싹불의 낯짝으로 나타나기도 하였다. 어찌 보면 이 네 사람 얼굴 외에 난생 처음 보는 기괴한 탈을 뒤집어쓴 무리들이 떼를 지어 달려들기도 하였다.
간신히 그 지긋지긋한 잠을 깨고 나면 처음에는 천장도 보이고 벽도 보이고 방바닥도 보이고 이것이 우리집이거니, 이것이 내 방이거니 생각하매 겨우 안심의 숨길을 돌릴 수 있었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잠깐이었다. 뒤미처 그의 핑핑 내어둘리는 시선에는 더 진저리나고 악착한 헛것이 보이었다.
귀밑머리를 충충 땋은 아름다운 서라벌 계집을 끼고서 아사달이 현연히 내닫는다. 그 아름다운 눈매는 그 계집을 살가워 못 견디겠다는 듯이 들여다본다. 그 연연한 입술엔 행복에 가득 찬 웃음을 웃고 있다. 그의 팔은 다시 떨어지지 않을 것처럼 그 계집의 허리에 감긴다…….
"무슨 그럴 리야, 무슨 그럴 리야."
아사녀는 뇌고 또 뇌며 고개를 설레설레 흔들었지만 제 눈시울 속속들이 들어박힌 듯한 그 헛것은 더욱 또렷또렷하게 생생하게 살아온다.
아사달이가 아이놈을 갸둥질쳐 주는 광경까지 보인다.
아이놈의 상판은 쥐새끼같이 작고 가무잡잡한 것이 볼품이 없었으나, 그 숱 많은 머리가 다팔다팔하며 좋아라고 깔깔거리는데 그걸 보고 그 계집과 아사달이가 입이 벌어져서 찢어지도록 웃어 댄다…….
"나는 이 고생을 하는데……."
아사녀는 고만 새삼스럽게 설움이 복받치고 눈엣불이 번쩍번쩍 나는 듯하였다.
처음 싹불에게 아사달이가 딴 계집을 얻어 자식까지 낳았다는 소문을 들었을 때 아사녀는 앞뒤를 생각할 나위도 없이 벼락이 내리치는 것처럼 정신이 아뜩하고 말았었다.
가까스로 정신을 수습해 가지고 방으로 들어와 되는 대로 쓰러져서 곰곰이 생각하면 생각할수록 미쳐 나갈 것만 같았다.
이 세상에 육친이라고 오직 한 분밖에 없는 아버지를 여의는 큰 슬픔을 지그시 견딘 것도, 모래알을 씹는 듯한 길고 긴 삼 년의 날짜를 보낸 것도, 생각만 해도 소름이 끼치는 그 해참한 변을 겪은 것도 누구를 위함이었던가. 무엇을 바람이었던가.
지금 방장 당하는 처지가 쓸쓸하면 쓸쓸할수록 답답하면 답답할수록 지긋지긋하면 지긋지긋할수록 아사달을 만나는 날의 기쁨이 크고 더 알뜰하고 더 깨가 쏟아질 것이 아니었던가.
지금은 캄캄한 어둠이 저를 겹겹이 에둘렀지만 내일!이면 찬란한 햇발이 저를 맞으리라.
방장 걷는 이 길은 가시덤불을 헤쳐 나가는 것 같지만 모레!면 꽃밭 속으로 포근포근한 잔디를 밟게 되리라…….
아무리 슬픈 가운데도, 아무리 억색한 가운데도, 아사녀의 앞에는 언제든지 희망의 오색영롱한 무지개가 뻗쳐 있던 것이다.
작지의 변을 죽을 애를 쓰고 모면을 하고 나매, 그 달뜨는 정은 얼마쯤 움츠러들었지만, 기다리지 않는 척하고도 기다리는 마음은 더욱 간절하였다.
"웬걸 올라고."
하며 마음을 단속을 하면서도 실상인즉 무망중에 쑥 들이닥치면 더욱 반가울 것을 미리 장만을 해두려는 것이다.
"아직 공사 끝날 날이 멀고말고."
스스로 조비비는 듯한 마음을 타이르고 꾸짖었지만,
"이 보름 안으로야, 이달 그믐 안으로야."
하고 전보담 날짜만 멀리 잡아 보았었다.
가깝게 잡은 날짜가 맞지 않는 것은 오히려 심상하였지만, 멀리 잡은 날짜도 맞지 않는 데는 화증이 절로 났다.
'혹시나' 하는, 검은 구름장이 그 빛나는 희망의 무지개를 가끔 흐리게 시작하기는 이때부터였다.

무영탑 - 08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