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65

물동이를 부엌에 내려놓고 아사녀는 쏜살같이 아버지께로 뛰어들어갔다. 오래간만에 저를 찾아준 기쁜 생각을 한시바삐 병든 아버지에게 알려 주고 싶었던 것이다.
아버지는 막 기침을 하고 나셨는지 헉헉 하는 숨길이 턱에 닿고 번열이 난 탓으로 이불자락을 반나마 걷어쳤는데 그 칼등같이 드러난 갈비뼈를 보매, 아사녀는 지금 당장 꾸고 온 아름다운 꿈이 무참히도 부서지는 것을 느끼었다.
아무리 봄이 온다기로 이렇게 육탈한 아버지가 과연 회춘을 하실 것인가. 그렇게 기다리시던 아사달을 만나 보실 수 있을 것인가.
그래도 아사녀는 그렇게 좋은 공상을 단념하기에는 너무도 아까웠다.
"아버지, 아버지 인제 봄이 와요."
아사녀는 무두무미하게 아버지의 귀에다 대고 부르짖었다. 작년 겨울부터 귀까지 절벽이 되어서 작은 말낱은 알아듣지 못하는 아버지였다.
아버지는 감았던 눈을 번쩍 떴다. 무슨 보에 싸인 듯이 흐릿해 보이는 그의 안광이 이때따라 생기가 도는 듯하였다.
"응 누가 와, 아사달이가 와!"
하고 올강볼강하는 팔꿈치로 한옆을 짚고 힘을 부진부진 준다. 그는 분명 몸을 일으키려고 애를 쓰는 모양이었다.
"아녜요, 아녜요. 아사달님이 온다는 게 아녜요. 봄, 봄이 온다는 말씀예요. 강물이 다 풀리고……."
"뭐, 뭐, 봄, 봄이 와."
부석은 싱겁다는 듯이 떠들썩하게 쳐들었던 몸을 메다붙이듯 가라앉히고 만다.
"얼음장이 풀리고 물이 제법 졸졸 소리를 내고 흘러요."
"……"
부석은 자기에게 아무 상관이 없다는 것처럼 스르르 눈을 다시 감아 버린다.
"봄이 오면 그 몹쓸 병환도 나으실 게고……."
"봄이 온다고 내 병이 나을 듯싶으냐."
"그러면요. 일기만 따뜻해지면."
부석은 고개를 흔들었다. 고개를 흔들었다느니보담 차라리 흔드는 시늉을 해보이었다. 그리고 역정이 몹시 날 때 하던 버릇으로 눈썹을 치켜올리고 그 영채 없는 눈으로 잔뜩 천장을 노리었다.
봄이 온다는 말이 이렇게도 아버지의 귀에 거슬릴 줄이야.
아사녀는 한참 무료하게 앉아 있다가 문득 아침밥이 늦어 가는 것을 생각하고 몸을 일으켰다. 아침을 짓는대야 아버지는 미음을 끓여 드리고 밥 먹을 이는 저 하나뿐. 그리고 누룽지를 치워 줄 삽사리 한 마리. 신신치 않은 일이나마 문병 오는 제자들이 달려들기 전에 아침밥을 먹어 치워야 한다.
아사녀는 막 방문을 열고 나가려 할 제 부석은 매우 못마땅한 눈치로 거의 흘겨보다시피 돌아본다. 말은 안 하여도,
"나 혼자 남겨 놓고 또 어디를 나가느냐."
하고 꾸짖는 것 같았다. 아버지는 요새 와서 걸핏하면 화를 내시고, 더구나 아사녀가 곁을 떠나는 것은 질색이었다.
어질고 자상스럽던 성미도 병에 부대끼어 변해진 듯하였다.
아사녀는 다시 아버지 곁으로 왔다.
"아버지 잠깐만 혼자 계십시오. 아침밥을 짓고 들어오께."
아사녀가 다시 들어오자 아버지는 돌아누워 버리고 알은체도 하지 않았다.
"녜 아버지, 아침을 지으러 나가야 되지 않아요."
"그래라" 하고 대꾸는커녕 고개까지 끄덕여 주지 않았다.
"녜 아버지, 저는 나가 봐야……."
또 한번 재우쳐 보았건만 아버지는 눈까지 감고 제 딸이 거기 서 있는 것조차 잊어버린 것 같았다.
아사녀는 망단하여 서성거리며 아버지의 축난 얼굴을 물끄러미 들여다보았다.
그 푹 꺼진 눈자위에 눈물이 펑하니 괴어 오른다.
"아버지, 아버지!"
아사녀는 억색하여 부르짖었다.
"그래 봄, 봄이 오면 아사달이 온다더냐."
다시 눈을 뜨는 아버지는 눈귀와 눈초리가 깊은 탓인지 눈물은 흔적도 없이 잦아져서 방금 우신 것 같지도 않으나 그 말소리는 몹시 떨리었다.
그러면 아버지도 자기와 꼭 같은 생각을 가지고 계셨던가.
"오고말곱시오. 떠난 지 벌써 세 번째 봄이 오는데."
"음, 세 번째 봄이. 음, 봄이 완구히 오기 전에 아사달이가 와야 될 텐데. 요 며칠 안에 아사달이가 와야 될 텐데……."
"……"
아사녀는 무슨 뜻인지 잘 알아차릴 수 없었다.
"음, 요 며칠 안에…… 암만해도 너 혼자 남겠구나……."
아버지는 수수께끼 같은 말을 남기고 다시 눈을 감아 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