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61

아사달은 굵은 빗발이 떨어지는 것을 보고 놀랐다.
"기예 비가 오시는군요. 이렇게 뇌성벽력을 하니 비가 오셔도 많이 오시겠는데."
"비가 오시면 어때요. 비쯤 맞으면 어때요. 비걱정을랑 마시고 나를 데려가시겠다고 언약을 해주셔요, 맹서를 해주셔요. 부여든지 어디든지 아사달님 가시는 데 같이 간다고 속시원하게 일러 주셔요."
"……"
우루룩우루룩 천둥은 갈수록 잦아 간다.
쉴새없이 번개는 친다. 그 사나운 불채찍은 어둠을 후려갈기고 빗발을 누비질하며 번쩍거린다.
와지끈자끈 벼락은 닥치는 대로 바수어 내는 듯 온 누리가 이 호통의 으름장에 겁을 집어먹고 부들부들 떠는 듯하였다.
주만의 불을 뿜는 듯한 하소연은 그대로 계속되었다.
"불국사에서 처음 뵙던 그 순간 나의 운명은 벌써 작정이 된 것이야요. 다보탑 밑에서 신기하게도, 참으로 신기하게도 두 번째 만나 뵐 제 나의 일생은 귀정이 나고 만 것이야요. 그때부터 이 몸은 아사달님 없이는 이 세상에 못 살 줄 알았습니다. 아사달님 아니고는 나에게 기쁨을 주고 행복을 줄 이가 또다시 없는 줄 깨달았습니다. 세 번째 석가탑 위, 지금 앉은 이 자리에서 혼절하신 모양까지 뵙게 된 것은 우리의 이상한 인연이 아주 굳어지고 만 것입니다."
비는 어느결에 폭우로 변하여 좍좍 쏟아지기 시작하였다.
"옷이 다 젖으십니다. 이 바위부리 밑으로라도 잠깐 의지를 하십시오."
아사달은 딱한 듯이 또 한번 재우쳤다.
"왜 자꾸 딴말씀만 하세요. 이 옷이야 다 젖은들 어떠해요. 아사달님이 허락만 하신다면 이 비를 맞고 그대로 짓물러나도 좋아요. 그대로 잦아져도 좋아요. 녜, 아사달님, 같이 가실 테지요. 함께 간단 말씀을 해요."
"……"
아사달도 노박으로 맞는 비를 피하려고도 아니하고 눈을 감아 버렸다.
이윽히 무엇을 생각하는 듯하다가 마침내 차마 하지 못할 말을 하고야 말았다.
"구슬아기님, 그것은 안 될 말씀입니다. 나에게는 어엿한 아내가 있답니다. 나 돌아오기를 손꼽아 기다리는 아내가 있답니다."
이 말을 하기에 아사달은 가슴이 갈기갈기 찢기는 듯하였다. 자기의 둘도 없는 아름다운 동정자에게 이 말을 들리기는 너무도 면난쩍었다. 너무도 무참하였다. 그 어여쁘고 고운 염통을 칼로 저미는 것이나 진배없었다. 아까부터 몇 번을 이 말을 할까말까 망설이었다. 목구멍까지 올라왔다가 스러지고 혀끝에 뱅뱅 돌면서도 입 밖에 내지를 못하였다.
그러나 이 말을 듣는 것은 한때의 고통. 이런 줄을 모르고 처녀의 마음을 끝끝내 바치게 하는 것은 크고 더 무서운 죄악인 양하였다.
그는 마침내 마음을 결단하였다. 이를 악물고 이 말을 하고 만 것이었다.
과연 열에 뜨인 주만에게도 이 말만은 여무지게 울린 듯하였다. 화살을 맞은 비둘기 모양으로 그의 몸은 흠칫하였다.
그러나 그렇다고 움츠러들 주만이가 아니었다. 날카롭게 찔린 상처의 아픔을 지그시 견디는 듯하더니 아까보담 더욱 흥분된 목소리로 그 말을 받는다.
"나도 알아요, 부인이 계신 줄을 나도 알아요. 장인이요 스승이신 어른의 따님이 부인이신 줄 나도 알아요. 의젓하고 아름다운 부인께서 댁에서 아사달님 돌아오시기를 나날이 기다리시는 줄 나도 알아요. 나도 그 때문에 얼마나 고민을 하였을까, 애간장을 끓였을까……남의 남편, 남의 서방님을 흠모하는 이 몸이 얼마나 미웠을까……."
하고 주만은 지나친 흥분에 잠깐 말을 끊었다.
"그러나 그것도 인제는 지난날의 몹쓸 꿈으로 사라지고 말았습니다. 남편이 되고 아내가 되는 것보담 더 높은 정이 없을까, 더 깨끗한 사랑이 없을까요. 아무리 부인이 계시다 한들 사랑이야 어떡하실까. 나는 그 어른의 형님이 되어도 좋고 동생이 되어도 좋아요. 나는 다만 아사달님 곁에만 있으면 고만예요. 하루 한 번, 열흘에 한 번이라도 아사달님을 뵈올 수만 있다면 고만이에요."
비는 점점 소리를 치며 내리퍼붓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