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56

어둠! 무수한 머리올처럼 올올이 가물거리며 단 두 남녀를 겹겹이 에워싼 어둠.
수줍음도 부끄러움도 뒤덮어 주는 어둠. 망설임과 거리낌도 휩싸 버리는 어둠.
그 공능자작 밑에서 무엔지 활개를 친다. 그 수룡이 속에서 무엔지 버르적거린다.
어둠은 속살거린다. 어둠은 꾀인다.
주만은 이 어둠이 지겹고 무서웠다.
"아무리 어두운 밤이라 한들 이렇게도 어두울까요."
그는 보이지도 않는 아사달을 눈어림으로 더듬으며 침묵을 깨뜨렸다.
"얼마쯤 기다리시면 차차 밝아집니다."
아사달은 아무 구애도 없는 듯 태연하였다.
"아무렇기로 어두운 밤이 어떻게 밝아를 져요."
"밝음에 익는 것이나 어둠에 익는 것이나 눈에 익기만 하면 마찬가지지요."
"그러면 아사달님은 내 얼굴이 보입니까."
"똑똑히는 안 보입니다마는 으렷이는 보이지요."
"내 눈엔 아사달님이 보이지를 않는데."
"그러면 눈을 한참 감았다가 다시 떠보십시오."
주만은 시키는 대로 눈을 감아 보았다.
어둠 속에 제 눈까지 감아 버린 아름다운 처녀!
한참 만에 주만은 눈을 다시 떴다. 이만큼 저만큼 마주앉은 두 사이가 조금도 좁아들지도 않고 늘어나지도 않은 것이 도리어 이상스러웠다.
"눈을 감았다가 떠도 어디 보여요."
"인제 차차 보여를 집니다."
아사달의 대답은 너무 의젓하다.
수작의 실마리는 다시금 끊어지고 말았다.
그가 알고 내가 알 뿐인 단둘의 암흑세계! 은밀한 수작을 실컷 마음껏 주고받는다 한들 어둠에서 어둠으로 사라질 뿐이 아니냐. 깊이깊이 접어 넣은 비밀을 활활 털어 낸다 한들 이 가슴에서 저 가슴으로 쥐도 새도 모르게 옮겨질 뿐이 아니냐.
그러하거늘, 그러하거늘 왜 이렇게 데면데면하게 차리고만 있는가, 점잔만 빼고 있는가.
주만은 아사달을 만나기만 하면 할 말이 천겹 만겹 쌓이고 쌓이지 않았던가. 혼자 속을 태우다가 마침내 마음을 결단하고 이 밤에 그를 찾은 것이 아니었던가.
정작 그를 대하고 보매 말 한마디도 시원하게 나오지 않을 줄이야! 가슴만 가득하게 부풀어오르고 서리서리 얽히었던 하소연 한 가닥도 제대로 풀려 나오지 않을 줄이야! 알뜰한 그이를 앞에 두고도 벙어리 냉가슴을 그대로 앓을 줄이야! 이렇게 좋은 자리, 이렇게 좋은 기회를 만났거든 피를 끓이는 진정을 쏟아 버리지 못할 줄이야!
설렁 하고 밤바람이 인다. 휘젓한 절 마당을 두루마리를 하다가 와하고 탑 위를 지쳐들어 그린 듯이 앉은 두 남녀를 휘몰아 낼 것같이 불어 제친다.
"웬 바람이 갑자기 이렇게 불어요."
주만은 얼굴을 외우시며 중얼거렸다. 그러자 그는 속으로,
'내가 기껏 한다는 것이 겨우 이 말인가. 바람이 나에게 항상 큰 일인가? 온 서라벌이 다 날려간들 나에게 무슨 계관이 있단 말인고.'
"저 소리를 들어 보셔요. 저 풍경이 우는 소리를."
아사달은 주만의 말을 받으며 풍경 소리에 귀를 기울인 모양이다.
"천연 우리 부여 고란사 풍경 소리 같군요."
"고란사에도 풍경이 있어요?"
주만은 허정대고 대답을 하였다.
"있구말구요. 내 집이 고란사에서 멀지 않은 탓에 이따금 그 풍경 소리를 듣지요."
"……"
풍경 소리에까지 고향을 그리는 나그네의 심정을 몰라줄 주만이가 아니었지만, 제 속은 이렇게 조이는데 고장 회포만 자아내는 아사달의 말에 대꾸할 정황조차 없었다.
아사달은 하늘을 치어다보고,
"저편 솔밭 있는 편을 좀 보셔요. 뿌옇게 하늘에 뻗힌 것이 무엔 줄 아십니까? 그게 바람꽃이랍니다."
"바람꽃?"
주만은 시름없이 간단히 말을 받았다.
"바람꽃이 일면 정말 꽃이 떨어진다지요?"
"……"
"벌써 첫여름이 되었으니 떨어질 꽃도 얼마 남지는 않았겠지요마는……."
하고 아사달은 한숨을 날쉬었다.
그는 멀리 아사녀를 생각하고 타향에서 세 번째 봄이 속절없이 지나간 것을 한탄한 것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