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55

그 초롱의 임자는 묻지 않아도 주만과 털이었다.
털이는 째기발을 디디고 초롱을 높이 쳐들어 탑 위를 비추어 보더니,
"여기 계시군요."
하고 반가운 소리를 친다.
"아이 벌써 일을 또 시작하셨구나."
주만은 거의 짜증을 내다시피 말을 하였다.
"아직 채 소복도 안 되셨는데 또 덧치시면 어떡해요."
털이도 제 아가씨의 뜻을 받아 걱정을 한다.
"엊그제 기절까지 한 이를 일하는 걸 말리지도 않고 그대로 내버려두다니."
주만은 누구에겐지 모르게 불평만만하다.
아사달은 얼마쯤 무관해진 주만의 주종의 목소리를 알아듣고 탑 가장자리까지 걸어나왔다.
"이 어두운 밤에 어떻게들 오셨습니까."
하고 미안해한다. 주만은 탑 가까이 바싹 들어서며,
"어떡하시자고 어느새 또 일을 시작하셨단 말씀예요."
초롱의 빛과 그늘이 어룽이 져서 자세히 보이지 않으나마 아름다운 얼굴을 찌푸리며 매우 아끼고 애달파한다.
아사달은 어둠 속에서 팔뚝에 힘을 주어 보이며,
"인제 이렇게 든든해졌는데요. 성한 사람이 일을 않고 있으니 되려 병이 덧칠 것 같아요, 허허."
오래간만에 웃는 소리를 들으매, 과연 완쾌가 된 듯 한결 마음이 놓이는 듯도 하였다.
"그래도 얼마쯤 더 쉬시는 게 좋을 것 갖다가……."
"더 쉬면 더 기운을 차릴 수가 없게 될는지 모르지요."
아사달은 오늘 밤따라 수작도 잘 하고 매우 쾌활해진 듯하였다.
"워낙 성미가 겁겁도 하시군요."
주만도 난생 처음으로 농담 비슷하게 한마디를 던져 보았다.
"급하기야 오늘 밤으로라도 끝을 내어 버렸으면 좋겠습니다만."
"그러면 우리도 곧 가야겠군요. 밤새 하시는 일에 방해가 될 듯하니까요."
"고새야 무슨 큰 방해가 되겠습니까. 나도 지금 막 일손을 쉬는 참입니다."
"그러시다면 잠깐만 놀다가 갈까……."
하고 주만은 망설이었다. 그는 혹시나 아사달이 내려올까 하였으나 저편에서 그런 기색은 보이지를 않았다.
"그러면 아가씨가 탑 위로 좀 올라가 보십시오. 오늘 밤에는 까무러치시지는 않으실 테입지요, 오호호."
털이가 난처해하는 주만을 부축하였다.
"그러면 내가 좀 올라가 볼까, 이 캄캄한 가운데 어떻게 일을 하시나 구경을 좀 하게."
제 일자리를 남에게 보이기를 몹시 꺼리는 아사달이지만 주만의 이 청은 물리칠 수 없었다. 제 재생의 은인이라 해도 과언이 아닌 그의 말을 어떻게 거스를 수 있으랴.
그러나 아사달이 허락을 하고 거절을 할 나위도 없었다. 주만은 어느결에 사다리를 부여잡고 발을 올려놓는다. 아사달은 삐둑삐둑하는 사다리 웃머리를 잡았다.
주만은 조금도 서투르지 않게 사다리를 거의 다 올라왔으나 사다리가 너무 곤두서고 위층이 두 간이나 탑 위로 솟아 있기 때문에 긴 치마에 걸리어 얼른 걸타넘기에 조금 벅찼다.
아사달의 손은 저절로 주만의 손길을 잡아 주는 수밖에 없었다.
맨 처음으로 마주잡는 두 손길!
주만의 비단결 같은 손길이 아사달의 손아귀에 몰씬하게 녹아들었다. 아사달의 훈훈하고 억센 아귓힘이 주만의 손등과 바닥에 얼얼하게 남았다.
주만의 눈앞이 아뜩해진 것은 사다리를 걸타넘고 발 놓인 자리가 캄캄한 탓만이 아니리라.
털이가 초롱을 들고 뒤따라 올라오다가,
"여기 있습니다. 이 초롱을 받으십시오. 쇤네는 차돌에게 가서 놀고 있겠으닙시오."
하고 초롱을 치켜든다.
"조금 있다가 같이 가면 어떠냐."
"쇤네는 차돌에게 부탁할 말도 있굽시오. 아무튼 잠깐 다녀와야겠는뎁시오."
주만도 아까 아사달의 처소로 갔다가 마침 차돌이가 없어서 전복찜을 해가지고 온 것을 어디 두었다고 이르지 못한 것을 생각하였다.
"그럼 다녀오렴. 어두울 텐데 초롱을 네가 들고 가려무나."
"쇤네가 초롱을 가져가면 아가씨가 너무 어두우실 걸입시오."
"내야 가만히 있으니 괜찮지만 길 걷는 네가 어둡지 않겠니."
"그러면 쇤네가 가져갈깝시오. 두 분이 계시면 무섭지는 않으실 테닙시오. 오호호."
털이는 제가 초롱을 들고 종종걸음을 치며 내려간다.
아사달과 주만은 이윽고 초롱이 일렁일렁 떠나가는 것을 바라보고 있다가 둘은 의논이나 하듯이 서로 돌아보았다.
그러나 옻빛 같은 어둠에 싸이어 피차에 얼굴조차 알아볼 수가 없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