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종은 주만을 보고,
"오 구슬아기냐. 밤이 늦었는데 왜 자지를 않고 나왔느냐."
"그 애가 금시중이 오셨다는 말을 듣고 입때 조바심을 하고 있었답니다."
사초부인은 딸을 대신하여 대답하였다.
"금시중이 찾아왔기로 네가 조바심을 할 게 뭐냐."
주만은 대답을 못 하고 고개를 푹 수그린다.
"금시중이 어째 아닌밤중에 찾아를 오셨소."
"어, 당주를 가지고 옛 친구를 찾아왔다 하오."
"그런데 무슨 말이 그렇게 길어요. 사내어른이 어쩌면 그렇게 수다스러울까."
"그 골치 아픈 당학을 또 늘어놓은 것이오."
"이 애가 하도 사람을 졸라서 몇 번을 나와 엿들어도 말낱은 자세 안 들리나 그 말이 그 말이고…… 나중에는 들어가서 깜빡 잠이 들었는데 이 애가 인제 금시중이 돌아가셨다고 깨워서 무슨 말인가 여쭈어 보려고 나온 것이라오."
"네 혼인말이 나온 줄 알고 좀이 쑤신 게로구나."
유종은 고개를 빠뜨리고 앉아 있는 주만을 돌아보며 빙그레 웃었다.
"그래 얘 혼인말이 나왔습니까."
"그야 물론이지. 말하자면 청혼을 하러 온 것이야."
"청혼? 그래 허혼을 하셨소."
주만은 숙였던 고개를 번쩍 들고 맥맥히 제 아버지의 입을 바라본다.
유종의 말도 흥분의 가락을 띠어 온다.
"그야 말이 되오. 그 진저리나는 당학파하고 혼인을 하다니 될 뻔이나 한 수작이오."
"그러면 거절을 하셨단 말씀이오. 후환이 무섭지 않을까."
"아무리 후환이 무섭기로, 이 주름살 잡힌 목에 칼이 들어온다기로 못 할 것은 못 한다고 거절을 할 수밖에 있소."
주만은 자기 아버지가 어떻게 든든하고 고마운지 몰랐다.
"아버지!"
한마디 부르짖고 그 자리에 푹 엎어져서 울고 싶었다.
"참 잘하셨소. 미룩미룩 끌어가는 것보담 아주 단정을 내버리는 것이 피차에 시원한 노릇이니까."
"그는 그러하고라도 딴은 저 애 혼인이 급하단 말이지. 벌써 열여덟이니 시집갈 나이도 되었거든."
"그래요. 허나 어디 마땅한 사람이 있어야지. 넘고 처지고."
"합당한 자리에 꽉 정혼을 해버려야 금지 따위가 다시는 이렁성저렁성하지도 못할 텐데……."
"글쎄요, 어디 합당한 자리가 있나요."
"있구말구."
유종은 자신 있게 대답을 한다.
"뉘 집안입니까."
"왜 전에 이손을 지낸 금량상이라고 있지 않소."
"오 옳지, 참 두 분이 절친하셨지. 그분이 아들이 있던가."
"아들이 아니라 그이의 동생이 있단 말이오."
"녜, 동생이 있어요!"
사초부인은 고개를 끄덕끄덕한다.
"금경신이라고 바로 작년 봄에 궁술 검술에 장원을 한 사람 말이오."
"오 옳지, 그런 출중한 인물은 처음 보셨다고 입에 침이 없이 칭찬을 하셨지."
"그러니 신랑감은 다시 더 볼 나위 없고 문벌도 금지옥엽이라 금지쯤은 누를 수 있겠는데 저편에서 허혼을 해줄는지. 또는 그 동안에 다른 데 정혼이나 안 했는지."
"글쎄 그게 걱정이구려. 그러면 내일이라도 사람을 보내어 염탐을 해보지요."
"다른 사람을 보내는 것보담 절친하던 친구를 만나 본 지도 오래니 내가 몸소 가볼까 하오."
"그러면 그렇게 하시지. 그 혼인이 될 말로야 작히나 좋을까."
부부는 매우 기뻐하며 하루바삐 이 혼인을 서둘려 하였다.
주만은 금시중 집안과 혼인이 터진 것을 기뻐할 겨를도 없이 새로운 벼락이 뒷덜미를 내리짚었다.
금성이와의 혼인은 설령 아버지가 허혼을 하셨다 해도 끝내 반대할 이유와 거리가 있었지만 경신과의 혼담은 저쪽에서 거절을 하기 전에는 모면할 핑계조차 없었다.
산은 오를수록 높고 물은 건널수록 깊다.
이 일을 장차 어찌할까. 아무리 저를 애지중지하시는 부모님께라도 이 가슴속에 서리는 번민을 털어바칠 수는 없는 일이다.
주만은 그 자리에 고꾸라지며 엉엉 소리를 내어 울고 말았다.
"이 애가 왜 울까."
부부는 울음 소리에 놀랐다.
"왜, 너무 좋아서 우느냐."
유종은 들먹거리는 딸의 어깨를 바라보며 물었다.
"얘 불길하다. 무슨 방정맞은 울음이냐."
어머니는 질색을 하며 딸을 달래었다.
"저는 싫어요, 전 싫어요. 시집은 안 갈 터예요." 하고 주만은 껄떡거리며 하소연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