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량상의 아우 경신!
"그런 인물을 내가 어찌 까맣게 잊었던가."
유종은 스스로 제 기억이 흐려진 것을 책망도 하고 괴탄도 하였다.
"만일 그가 내 사위만 된다면야 그 따위 금지쯤이야."
풀기 하나 없던 그에게 새로운 기운이 넘치는 듯하였다.
그대도록 경신이야말로 유종이 꿈꾸는 사윗감으로 쩍말없이 모든 자격을 갖추었다.
우선 지체로만 보아도 내물왕(奈勿王)의 직계후손이니 금지의 문벌보다 높았으면 높았지 떨어지지 않았다. 경덕왕께서 만득왕자라도 두셨기에 망정이지 만일 무후하시었던들 대통을 이을 이는 금량상 형제밖에 없다는 것이 떳떳한 공론이었다.
더구나 그 형제들은 어디까지나 당학파를 미워하고 국선도를 숭상하는 점으로 자기에게 둘도 없는 동지자라 해도 과언이 아니리라.
다만 그들에게 현재는 그리 큰 권력이 있다고 볼 수 없는 것이 한 가지 흠절이라면 흠절이리라.
그야 금량상이 그대로 조정에서 있기만 하였으면 골품으로나 덕망으로나 벌써 상대등이 되었으련만, 임금께와 당나라에 아첨하기로만 일을 삼는 무리들하고 한 조정에 어깨를 나란히 하는 것이 치욕이라 하여 이손의 벼슬을 버리고 향제에 드러눕고 말았다. 몇 번 왕명으로 부르셨지만 끝끝내 뜻을 굽히지 않았다. 만일 웬만한 사람이 이런 짓을 하였더면 그 간악한 당학파들이 그 능란한 붓끝을 휘둘러 무슨 누명이든지 뒤집어씌워 참화를 면하기 어려웠겠지만 왕의 믿으심도 두터우려니와 지체가 높은 탓으로 감히 개구들을 못 한 것이었다.
향제에 돌아가 누운 뒤에는 아무 거리낌없이 자제들의 훈육을 일삼고 국선도를 밝히기에 몸과 마음을 바친다는 소문은 풍편으로 들어 알았다.
조정의 일이 날로 그르고 국운이 차차 기울어짐을 혼자 한탄하다가도,
"오 옳지 아직도 양상이 남았구나. 그가 있는 다음에야 우리나라는 태산 반석과 같다."
하고 백만의 응원병을 얻은 것처럼 든든히 여긴 것도 한두 번이 아니었다.
"그 아우 경신, 그는 제 형보담 못하지 않은 영웅이다. 옳다, 인제는 되었다."
유종은 혼자말로 중얼거리며 무릎을 치고 일어서서 방 안을 거닐었다.
그의 눈앞에는 경신의 모양이 완연히 나타났다.
후리후리한 키에 떡벌어진 어깨판, 탁 트인 이맛전과 너그러운 뺨은 언제든지 싱글싱글 웃는 듯하였으나 어딘지 늠름한 위풍을 갖추어 대하는 이의 머리를 저절로 수그리게 한다.
유종이가 그를 눈익혀 보기는 작년 봄 신궁 앞 넓은 마당이었었다.
신궁에서 큰 제향을 마치고 그 앞마당에서 활쏘기와 칼겨룸의 모임이 열리었다. 계림 팔도에서 한다하는 낭도(郎徒)들이 구름같이 모여들어 그 수효는 만으로 헤아렸다.
여러 곳 활터와 칼터에서 첫 겨룸, 둘째 겨룸이 차례로 끝이 나고 맨 나중에 뽑히고 또 뽑힌 낭도는 스무나뭇에 불과하였다.
그 중에서 칼겨룸과 활쏘기 두 가지에 맨 나중까지 뽑힌 사람은 경신 하나뿐이었다.
그때부터 경신은 만장의 인기를 독차지하게 되었다.
그러나 마지막 겨룸은 오히려 싱거웠다. 한 번도 아슬아슬한 고비도 없이 경신이가 두 가지에 너무 쉽사리 장원을 하고 말았다. 그의 궁술과 검술이 지나치게 뛰어난 것이다.
"어, 그 화살이 세기도 하더군."
활줌통이 척 휘어서 거의 부러질 듯하자 잉 소리를 치고 화살은 흐르는 별보담 더 빠르게 날아가서 영락없이 과녁을 들어맞히고 남은 힘이 넘치어 살 위에 꽂힌 새깃이 부르르 떨던 것이 지금도 유종의 눈에 선하였다.
"어 무서운 화살이야, 무서운……."
유종은 혼자 방 안을 왔다갔다하며 정말 무서운 듯이 고개를 쩔레쩔레 흔들고 중얼거릴 제 문득 등뒤에서 말소리가 났다.
"아이 아버지께서는 뭘 혼잣말씀만 하고 계셔요."
유종이가 뒤를 돌아보니 어느결에 들어왔는지 사초부인과 주만이가 서 있었다. 그는 골똘히 경신의 생각을 하고 있느라고 제 아내와 딸이 영창을 열고 들어오는 줄도 몰랐던 것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