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49

별안간 금지가 유종의 소매를 탁 잡는 바람에 유종의 들었던 술잔이 반나마 엎질러졌다.
"친한 것을 비끄러매다니?"
유종은 얼근한 김에도 이 군이 인제야 제 본색을 나타내는구나 하고, 경계하면서 채쳐 물었다.
"그만하면 알아들으실 법한데. 우리 진진지호를 맺어 봅시다."
"진진지호?"
이손은 얼른 알아듣지 못하였다.
"정말 못 알아들으셨소. 왜 열국 적의 진(秦)나라와 진(晋)나라가 있지 않소. 아시는 바와 같이 때는 춘추전국시대, 나라와 나라 사이에 싸움이 끊일 날이 없고 생령은 도탄에 들었으되 오직 이 진과 진과는 서로 혼인을 한 까닭에 의좋게 화평을 누렸다 하오. 그래서 서로 사돈 되는 것을 진진지호를 맺는다 하지 않소."
유종은 금지의 이번 방문을 처음부터 수상쩍게 여기고, 혹은 청혼을 하러 오지나 않았는가 하는 의심이 없지 않았으나, 비장한 술을 가져오고 당학을 늘어놓고 하는 바람에 별다른 목적도 없이 정말 옛 친구를 그리워 심방한 것이거니 하고 믿었다가 이 별안간의 청혼에 놀랐다.
그야 전부터라도 두 집 사이에 혼인말이 있기는 있었다. 금지 집안에서 몇 번 와서 선까지 본 일도 있었고 안으로 청혼을 하자고 설왕설래는 하였지만 색시집에서는 신붓감이 아직 미거하다는 핑계로 이날 이때까지 왈가왈부를 보류해 둔 것이다.
유종은 내심으로 금지를 탐탁하게 알지를 않았고, 더구나 신랑 될 당자가 마음에 싸지를 않았다.
무남독녀 외동딸이 귀하기도 귀하려니와 그 재질과 기상이 아비의 눈에는 더욱 뛰어나 보이었다. 세상에 으뜸가는 사위를 구하기에 아무 빠질 것이 없을 듯하였다. 천하영웅의 아내가 되어도 아주 부족함이 없을 것 같았다.
신라를 두 어깨에 짊어질 만한 인물,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고리타분한 당학을 한 손으로 막아 내고, 지나치게 흥왕하는 불교를 한 손으로 꺾으며, 기울어져 가는 화랑도를 바로잡을 인물, 이것이 유종의 꿈꾸는 사윗감이었다.
그러니 금성 따위는 그의 반눈에도 차지 않을 건 물론이다. 당나라 유학을 하고, 한림학사란 당나라 벼슬참을 한 것을 가지고 금지의 집안에서는 굉장한 영광으로 아는 모양이었으나, 유종에게는 오히려 눈꼴이 시었다. 더구나 가까이 자세 본 것은 아니로되 키가 달라붙은데다가 얼굴에 병색조차 돌고 장부의 기상이라고는 찾으려야 찾을 수 없는 것이 자기의 그리는 사윗감과는 대상부동이었다.
그러면 이 혼담을 대번에 거절해 버렸으면 그만이겠으되, 그렇지도 또 못할 사정이 있었다.
금지는 당당한 참뼈로 왕족으로 임금과도 그리 멀지 않은 종친이었다. 이런 자리를 함부로 거절하였다가 나중에 무슨 화를 입을지 누가 알랴. 아무리 호활한 그이건만 벼슬살이 육십 평생에 피비린내나는 참경도 여러 번 목견한 터라, 늙은 제 한 몸보담도 귀한 딸의 장래를 생각할수록 그의 결단성은 무디어진 것이다.
"진진지호! 어 좋은 말씀이오마는 내 딸이 아직 어리고 미거해서……."
유종은 말끝을 흐리마리한다.
"아니 영애가 방년이 몇이기에 어리고 미거하단 말이오."
금지의 눈엔 날이 서며 새무룩해진다.
"아직도 열여덟 살……."
"열여덟 살이면 꼭 알맞은 나이가 아니오. 외려 과년했다고 볼 수 있지 않소. 어느 것은 이팔청춘이라고 이팔보담 두 살이나 더한데."
"뭐 키만 엄부렁하지. 철이 나야."
이손의 말은 동문서답이다.
"우리 사이에 겸사가 왜 있겠소. 그야 부모의 눈으로 보면 자식이란 골백살을 먹어도 어려 보이는 것이오. 천하 못생긴 것이 제 자식을 자랑하는 버릇이지만 지독지애(소가 귀타고 새끼를 핥는 것)인지 모르나 내 자식놈으로 말해도 제법 재주도 있고 당서는 들어 대면 사서삼경이나 제자백가에 막힐 것이 없고, 이손도 아시다시피 그 나이에 그래도 한림학사란 벼슬까지 했고 신랑감이 그만하면……."
"그야 신랑감이야 두말이 왜 있겠소. 그저 내 자식이 아직 입에 젖내도 가시지를 않아서……."
"여보 이손, 나이 열여덟에 아직 입에 젖내가 나다니. 외동따님이 아무리 귀하기로 합부인께서 설마 입때 젖을 빨리실까, 헛허허."
시중은 장히 우습다는 듯이 한바탕 웃고 나서 다시 얼굴빛을 바루고,
"뭐 기닿게 얘기할 것 없이 우리 오늘 밤으로 아주 정혼을 해버립시다. 이손 어떠하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