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48

주안상은 벌어졌다.
유종은 소흥주를 따라 먼저 금지에게 권하였다.
"내가 가져온 술을 내가 먼저 들다니 말이 되오. 이손께서 먼저 드시구려."
"주인이 되고 먼저 들 수가 있소."
"어, 우리 사이에 주객을 따질 것도 없지 않소. 이손께서 먼저 맛을 보셔야지."
하고 손님은 한사코 주인에게 먼저 권하였다. 유종은 하릴없이 잔을 받아 들고,
"그 투명한 빛이란 정말 금파와도 같군."
살가운 듯이 이윽히 들여다보다가 훌쩍 마시고 술 묻은 웃수염을 빨며,
"과연 진품이로군. 기름같이 부드러우면서 준하고 향기롭고……."
"정말 술은 이손이 자셔 보셔야 해. 성인이라야 능지성인이라고. 정말 주성이시거든, 헛허."
시중은 그 조그마한 눈을 만족한 듯이 깜박깜박한다.
"미상불 내가 술을 좋아야 하지마는 어디 이런 진품이야 많이 먹어를 보았어야지. 시중 덕에 정말 선주 맛을 보았소."
"무얼 여기서 귀하다뿐이지. 상국엘 가면야 명색도 없는 술이지요. 내야 별로 술을 좋아하지는 않지마는, 들어간 김이라 몇 병 가지고 나왔을 뿐이지."
하고 제가 당나라에 사신으로 들어갔던 것을 자랑삼아 내어비친다.
주객은 주거니 받거니 거나하게 술이 돌았다. 금지는 술을 즐기지 않는다 하면서 그 깜찍하게 먹는 품으로는 오히려 유종을 뺨칠 만한 주량을 가졌다.
"시중께서는 그렇게 절주를 잘 하시지만 나는 술이 과한 편이지."
이손의 불그레한 얼굴에 땀방울이 숭숭 맺히었다.
"대성지성 문선왕 공자님께서도 술을 잡수셨는데 다만 유주무량하시되 불급어란(有酒無量不及於亂)이라 하셨을 적엔 과연 대음은 대음이었던 모양이오."
금지는 제 득의의 당학을 차차 늘어놓기 시작한다. 그 핏기 없는 얼굴에나마 광대뼈 언저리가 돈짝어란만큼 발그스름해 온다.
"당대 문장 이태백 같은 이는 여북해야 술이 대취해서 채석강에 달을 잡으러 들어갔다가 그대로 빠져서 고래를 타고 그냥 하늘로 올라갔다 하지 않소."
"고래를 타고 하늘에 올라갔다니, 그게 참말일까."
"참말이구말구. 이백이 기경비상천하니 강남풍월이 한다년이라(李白 騎鯨飛上天江南風月閑多年). 바로 백낙천의 시에 다 있는데……."
금지는 그 시 한 수를 다시 한번 늘어지게 읊조린다.
"대취한 김에 강에 떨어져 죽은 것 아니오, 허허."
"그야 그런지도 모르지요. 허나 그런 유명한 문장이 그렇게 물에 빠진다고 죽을 리야 있겠소. 고래를 타고 하늘에 올라가니 강남의 바람과 달이 한가롭게 되었단 뜻이 아니오. 이백이 같은 문장이 이런 진세에 있으면 애꿎은 강남의 달과 바람이 못 견디게 이렁성거린단 말이오. 이것은 달이 뜨니 어떻고 지니 어떻고, 바람이 부니 좋고 안 불어도 좋고, 하루에도 여러 백 수 여러 천 수 시를 지어 놓으니 바람과 달인들 괴롭지를 않겠소. 그러니 옥황상제께서 불러가신 거라오."
시중은 입에 침이 없이 신이야 넋이야 말끝을 이어나간다.
"우리 신라에야 어디 그런 풍류객인들 있소. 풍월당이니 뭐니 하고 모이기만 하면 그 음탕한 노래들이나 부르고 걸핏하면 칼부림이나 하고, 살풍경이지 살풍경이야. 저네들은 술을 마셔도 조가 있어 불급어란이지만 이것은 술타령 계집타령에 헤어날 줄을 모르니."
금지는 괴탄괴탄을 한다.
"왜 우리나라에도 좋은 풍류와 씩씩한 노래가 많았지만 너무 태평건곤에 겨뤄 놓으니 옛 풍조가 스러지고, 인심이 점점 나약해 가고 풍속이 사치를 일삼으니 그게 한탄할 노릇이란 말이오."
"글쎄 누가 아니라오. 이손의 안목으론 신라 것이면 뭐든지 다 좋아 보이시겠지만 한번 당나라에를 들어가 봐요. 참 기가 막힌단 말이오. 그야말로 옥야천리에 며칠을 가고 또 가도 산 하나 구경할 수 없는 데가 없나. 산이 높으면 어느 것은 태산이라고, 바로 하늘을 찌르는구려. 하늘에서 내려온다는 황하수는 길이도 수천 리, 뭐 바다보담 더 넓은 강이 없나. 경으로 말해도 소상강에 실비가 내리는 거라든지 은하수를 그대로 기울여 놓은 듯한 여산폭포라든지. 이걸 보고 나서 신라 산천을 보면 소위 들판이란 손바닥만하고 산이라고 올망졸망, 큰강이라야 뭐 실개천 폭밖에 아니 되니……."
제가 그 좋은 데를 다 보았다는 듯이 풍을 떨기는 떨었으나 기실 실제로 본 것보담 글에서 본 것까지 떼어 와서 능청스럽게 꾸며 대었다. 그러다가 저도 겸연쩍은 듯이 말을 뚝 끊고 가장 긴한 듯이 유종의 소매를 덥석 잡으며,
"이런 것은 다 취담이고. 우리 터수가 남유달리 친한 터이지만, 이 친한 것을 아주 대대로 비끄러매어 봄이 어떠하오."
하고 수수께끼 같은 말을 끄집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