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성의 주종이 주만과 털이에게 못 당할 망신을 당하고 돌아간 후 사흘 만에 시중 금지는 밤늦게 이손 유종을 찾았다.
"금시중 이 밤에 웬일이시오."
유종은 이 뜻밖의 손님을 맞아들이며 의아해한다.
"우리 둘 사이에 밤늦게 찾으면 어떠하단 말씀이오."
손님은 매우 다정한 듯, 다정한 탓에 매우 노여운 듯 주인의 인사에 티를 뜯는다.
"밤늦게 못 찾을 우리 사이야 아니지만 시중이 이런 어려운 출입을 하실 줄이야 정말 생각 밖이구려, 허허."
유종은 바른 대로 쏘고 껄껄 웃었다.
둘이 한 나이나 젊었을 적에는 다 같이 화랑으로 돌아다니면서 같은 풍월당에서 노래도 읊조리고 활쏘기도 겨루며 술을 나누기도 하였고 그 후 한 조정에 서서 피차에 귀밑 털이 희어졌으니 바이 안 친한 터수도 아니지만 속으로는 맞지 않는 두 사이였다.
금지는 철저한 당학파요, 유종은 어디까지 국선도를 숭상하는 터이니 주의부터 서로 달랐다.
금시중은 얼굴빛이 노리캥캥한데다가 수염도 없어 얼른 보면 고자로 속게 되었는데 이손 유종은 긴 수염이 은사실처럼 늘어지고 너그러운 두 뺨에 혈색도 좋으니 풍신조차 정반대였다. 더구나 하나는 깐깐하고 앙큼스럽고, 하나는 괄괄하고 호방하여 두 성격이 아주 틀렸다.
이마적 해서는 공석 이외엔 서로 만나는 일이 없었거늘 벌써 술시가 지난 밤중에 우정 찾아온 것은 유종으로 괴이쩍게 아니 생각할 수 없었던 것이다.
"나는 이손께 별다른 향념이 늘 있지마는 이손께서야 나 같은 위인을 어디 친구로 아셔야지."
"그게 무슨 말씀이오. 소홀은 내 천성이라 예의범절을 모르는 것을 과히 책망 마시오."
"그렇게 말씀하면 내 말이 지나친 듯 도리어 미안하오. 그것은 다 희담이고 오늘 저녁 밥을 먹고 뜰을 거니노라니 달이 여간 밝지를 않더구려. 그래 문득 이손 생각이 간절하단 말이지. 소시적에 같이 활쏘기 말달리기 칼겨루기 하던 생각이 불현듯 나는구려. 주사청루에서 술잔을 주고받고 한 계집을 다투던 생각까지 난단 말이오, 허허."
하고 감구지회를 이기지 못하는 눈치로 주인을 바라본다.
"시중의 말씀을 듣고 보니 어릴 적 지낸 일이 꿈결같이 눈앞에 떠오르는구려. 엊그제 소년이러니 어느덧 귀밑에 흰 털이 웬일인지. 몇 번 창상에 옛 친구도 많이 없어지고, 인제 그때 친구로는 과연 시중과 나만 남았나 보오."
손님의 말에 주인은 진정으로 감동된 듯 옛 회포를 자아내는 것 같다.
"그래 주고(酒庫)를 뒤져 보니 마침 당나라에서 내온 소흥주 한 병이 남았기에 그대로 꿰어차고 옛 친구를 찾아온 것이오."
하고 금지는,
"여봐라, 고두쇠야."
하고 부른다.
고두쇠는 제 얼굴 보이기를 매우 꺼리는 듯 거의 땅에 닿도록 고개를 빠뜨리고 두 손으로 술병만 추켜들어 받들어 올린다. 그것은 위가 빨고 아랫배가 볼록한 담회색 바탕에 꽃무늬를 올린 사기화병이었다.
"어, 병부터 진기하군. 밤중에 찾아 주시는 것도 고마운데 이런 진주(珍酒)까지 선사를 하시니."
휘황한 촛불 아래 그 둥둥 뜨는 듯한 꽃무늬를 바라보며 유종은 감탄한다.
"당나라에서는 술도 술이려니와 그 술을 담는 병도 가지각색, 여간 공을 들이지 않은 모양이니 토광인중에 딴은 대국이 다릅니다. 이까짓 것쯤이야 출 만한 것도 못 되지만."
금지는 만족한 웃음을 띄우며 당나라 예찬의 한마디를 비친다.
"어, 병까지 이렇게 치장을 할 적에야 술맛인들 여간 취택을 하겠소."
"그렇구말구. 술 종류만도 천 가지도 넘는답디다. 단놈 쓴놈 준한 놈에 순한 놈에, 어, 술 이름만 외우자도 몇 달 공부를 해야 된답디다. 정말 진품이야 우리들 손에 들어오지도 않고 이 소흥주란 것도 여러 백 종인데 이것은 그 중에 중길에나 갈는지."
당나라 것이라면 무엇이든지 싫어하는 유종이지만 워낙 술을 좋아하는 그이라, 당주만은 침이 저절로 넘어갔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