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46

"인제 새삼스럽게 객실로 가자, 오호호."
주만은 터져나오는 웃음을 막느라고 손등으로 입을 가리었다.
"처음에는 담을 넘고 나중에는 객실로 가는 것이 어느 오랑캐 예법인가요. 그것도 상주국 당나라에 가시어 배워 가지고 나오신 예법인가요, 오호호."
주만은 내 말이 너무 지나치는구나 하면서 슬쩍 금성의 기색을 살피었다. 아무리 얼굴 두께가 쇠가죽보담 두껍다 하더라도 이만만 해두면 코를 싸쥐고 물러나리라 하였었다. 저와 혼인말이 왔다갔다하는 처녀에게 이런 모욕을 당하였으니 사내다운 사내라면 발연변색하고 제 목을 찔러도 시원하지 않으리라 하였었다. 하다못해 혼담이야 끊어지고 말리라 하였었다. 다른 것이야 어디로 갔든지 혼담만 다시 이렁성거리지 못하게 되어도 만번 다행이라 하였었다.
그러나 금성은 일순간 눈에 뜨일락말락 입 가장자리를 몇 번 실룩실룩하였을 뿐이고 물러날 사색조차 보이지 않는다. 아까보다도 오히려 말문이 터지는 것 같다.
"객실이 있는 줄 알았으면 그야 처음부터 객실로 가다뿐이오. 왜 괴롭고 귀찮은 담을 넘으려 들겠소. 이러한 창피를 보는 것도 지극한 사랑의 탓. 구슬아기, 구슬아기, 살짝 마음을 좀 돌리시구려."
던적맞은 수작까지 뻔뻔스럽게 붙이고 제법 대담하게 주만을 똑바로 본다.
주만은 어마 싶었다. 그 꼴에 어디서 배워 온 억설인고. 더러운 말뿐인고. 아까는 북받치는 웃음을 참을 수 없더니 인제는 오장육부가 뒤틀려 올라왔다. 하등 벌레와 같이 한두 동강쯤 내었다고 꿈지럭거리지 않을 그가 아니다. 아무리 뼈가 저린 말이라도 말만으로는 부끄럼을 알 그가 아니다. 염의를 차릴 그가 아니다. 먼빛으로 한두 번 보아도 그 외양부터 신신치 않더니 그 속은 더더군다나 어이가 없었다. 이런 위인하고 빈말로라도 혼담이 있었던 것만 생각해도 찬 소름이 끼치었다.
"사랑이고 객실이고 인제는 때가 늦었소. 나도 볼일이 급하니 한림학사님도 어서 돌아를 가시구려."
"사랑에 밤낮을 가리리요. 일편명월을 등촉삼아 여기서 새고 간들 어떠리요."
말씨에 멋까지 부리고 그 콧소리로 신이 나서 읊조린다.
주만은 지겨운 뱀이나 본 것처럼 불현듯 말머리를 돌려서 털이를 보고,
"얘, 어서 앞대문으로 가자. 여기는 밤이슬을 맞으며 새고 가는 손님이 계시단다."
"녜, 쇤네가 그럼 얼핏 가서 하인청을 혼동을 시킵지요."
하고 털이가 총총 말을 놓아 가려 할 제 고두쇠는 껑청 뛰어와 말머리에 막아선다.
"이 녀석이 왜 또 이래, 이 녀석이 왜 또 이래."
털이는 악을 버럭버럭 쓰며 말을 뺑뺑 돌리고 있을 제, 금성은 주만의 말고삐를 잡고 늘어진다.
"구슬아기, 구슬아기, 사람의 괄시를 그리 마오. 정다운 부부로 한평생을 지낼 우리가 아니오."
금성은 곤드레만드레하며 말갈기에 이마를 대었다 떼었다 한다.
그는 담을 걸타고 앉을 때 워낙 겁을 집어먹어서 술이 얼마쯤 깨었고, 도둑야 호통에 혼뗌을 하자 주기가 간 곳 없이 사라진 듯하더니,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취해 오르기 시작한 것이다.
부부란 말에 주만은 몸서리가 쳤다.
"부부? 오호호. 누가 우리가 부부가 된답디까. 주만이 백 번 죽어도 밤이슬 맞는 한림학사의 아내는 안 될 터이니 염려 놓으시오."
하고 주만은 홱 고삐를 잡아치며 힘있게 채찍을 갈기매 말은 깜짝 놀라 곤두서더니 흐르렁흐르렁 콧소리를 치며 뛰어닫는다.
말고삐를 쥐고 있던 금성은 한 두어 간통 땅바닥에 질질 끌리며 따라가다가 고삐를 탁 놓자 그대로 곤두라져서 디굴디굴 굴렀다. 땅바닥을 짚고 가까스로 일어앉아 개개 풀린 눈으로 주만의 주종이 앞 대문으로 닫는 양을 멀거니 바라보며,
"얘, 매정하구나."
혼자말로 중얼거리고 나서 무너지는 듯이 그 자리에 다시 쓰러져버렸다.
털이를 잡다가 놓친 고두쇠는 창황히 뛰어와서 금성을 일으키고,
"이게 무슨 꼴입니까. 어서 가십시다, 어서. 만일 이손 댁 하인들이 우 몰려나오면 이런 창피가 어디 있겠습니까."
성화같이 재촉을 하였다.
"그래 가자, 가. 내 아내 노릇은 죽어도 않겠다? 어디 두고 보자."
금성은 주만의 간 곳을 노려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