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45

"쉬쉬, 금시중 댁 서방님 행차시다."
고두쇠는 털이의 힐난에 견디다 못하여 필경 본색을 드러내고 말았다. 저도 하도 창피한 일인 줄 알기 때문에 웬만하면 비대발괄로 어름어름해 넘겨서 이번 일은 쥐도 새도 모르게 감춰 버리려 한 것이었다. 그러나 주만의 주종의 태도로 보아 호락호락 넘어갈 것도 같지 않고 끝끝내 숨기는 것이 도리어 불리할 줄 알자 그냥 실토를 해버린 것이었다.
"금시중 댁 서방님 행차가 안녕도 하시군요."
털이는 또 주만을 돌아보며 깔깔댄다. 이 틈에 고두쇠는 부리나케 금성에게로 뛰어가서 제 상전의 옷에 묻은 흙을 털고 구김살을 펴고 말이 못된 옷매무새를 바로잡느라고 한동안 부산하더니 제 주인을 옹위하고 떡 버티고 서서 마치 적진이나 노리는 것처럼 이쪽을 향해 마주본다.
주만은 항복한 적장을 보러 가듯 말을 놓아 이 꼴사나운 손들 앞으로 천천히 몰아갔다.
고두쇠의 부축으로 일어서기는 섰으나 다친 데가 많은 듯 끙끙 안간힘을 주고 있던 금성은 천만 뜻밖에 주만이가 저를 향해 오는 것을 보자 몸둘 곳을 모르는 듯 엉덩이를 엉거주춤한 채 눈을 두리번두리번 입을 실룩거렸으나, 그래도 '행여나' 하는 생각에 까닭 없이 마음은 헤벌어졌다.
주만의 말머리가 거의 금성의 코앞에 닿을 만큼이나 되어 딱 걸음을 멈추었다. 털이가 그 뒤를 따른 것은 말할 것도 없다.
"이 어른이 금시중 댁 공자시냐."
주만은 차마 맞대 놓고 묻지는 않고, 금성을 눈으로 가리키며 털이에게 묻는다.
털이가 미처 대답을 하기 전에 고두쇠가 가로채었다.
"녜 그렇습니다. 이 어른이 바로 금시중 댁 공자 한림학사 어른이신 줄로 여쭙니다."
주만은 마치 적장에게 경의를 표하듯 마상에서 보일 둥 말 둥 허리를 굽히고,
"한림학사님, 이 밤중에 어찌한 출입이시던가요."
금성의 얼굴을 뚫어지게 바라보며 묻는다.
금성은 주만의 시선이 마치 햇발처럼 눈이 부시었던지 눈을 몇 번 껌벅껌벅하고는 무슨 말인지 입 안에서 웅얼웅얼 대꾸를 한다.
"그 어른이 뭐라고 하시느냐. 네가 대신 일러라."
주만은 고두쇠를 보고 묻는다. 그런 병신성스러운 위인하고는 말도 주고받기 싫다는 듯이.
고두쇠도 제 벙거지 위를 긁적긁적하며,
"소인의 귀에도 잘 들리지 않사와요."
하고 무참해한다.
"응, 너도 잘 못 알아듣겠느냐. 그러면 고만두어라마는 이후엘랑 서방님을 모시고 다니거든 대문이 어디고 담장이 어디라는 것을 똑똑히 가르쳐 드려라."
주만은 침이라도 튀 배앝는 듯 한마디 말을 남기고 곧 말머리를 돌리었다. 말이 몇 자국 굽을 떼어놓을 때 등뒤에서,
"구슬아기, 구슬아기님."
하고 턱 갈라진 목소리가 들린다.
"한림학사님, 무슨 말씀이시오."
주만은 마상에서 고개만 잠깐 돌이켜 물었다. 금성의 얼굴은 붉으락푸르락 이마에 기름땀이 맺힌 것으로 보아 그는 이 한번 부름이 얼마나 힘이 들고 어려웠던 것을 가리킨다.
"왜 남을 불러 놓고 말이 없으시오. 딱한지고."
주만은 금성이가 어물어물하고만 있는 것을 보고 또 한마디 채쳐 물었다.
"구슬아기, 구슬아기님, 마, 말께서 잠깐만 내리어 주었으면."
금성은 더듬더듬하면서도 이번에는 가까스로 알아들을 만큼 말을 얼버무린다.
"말께서 내려라! 그럴듯도 하신 말씀이오마는 금공자는 내 집 담의 손님인지는 모르나 내 손님은 아니니 하실 말씀이 계시면 마상에서 듣지요."
"나, 나, 구슬아기가 보, 보고 싶어서……."
하고 금성은 쫓겨온 사람 모양으로 숨을 헐레벌떡거린다.
"오호호, 내가 보고 싶으시어. 오, 옳지 그래서 내 집 담 위에 올라앉으셨군, 오호호."
하도 어처구니가 없다는 듯이 주만은 허리를 분질렀다. 그 웃음 소리는 달 빗긴 으슥한 길 위에 구슬같이 구을며 흩어졌다.
"남의 집 규중처녀를 보시고 싶다는 것부터 모를 말씀. 더구나 아닌밤중에 찾는 법도 없을 것이고, 설령 찾더라도 어엿한 대문이 있고 객실이 있거든 하인소시에 담장을 넘으니 그게 무슨 꼴이란 말씀이오."
주인은 손님을 꾸짖는 듯 타일렀다.
"빨리 댁으로 돌아가시고 이후엘랑 찾아오실 생각은 꿈에도 내지 마시기오."
이만만 하면 발을 돌릴 줄 알았던 금성은 뜻밖에 추근추근하게 덤벼들기 시작한다.
"그러면 우리 객실로 갑시다."
금성은 볼멘소리까지 하고 말낱도 차차 분명해 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