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44

도적놈이 제 이름을 부르는 데 주만은 일변 놀랍고 일변 호기심이 움직였다.
"너는 웬 놈이관데 내 이름을 안단 말이냐."
"녜, 그저 황송하오나 이손 유종 댁 외동따님 구슬아가씨를 아무리 소인 같은 무된 눈인들 몰라 뵈올 리야 있사오리까. 소인은 결단코 도적놈이 아니옵고……."
"도적놈이 아니라께. 아닌밤중에 남의 담장을 넘는 놈들이 도적놈이 아니라니 될 뻔이나 한 수작이냐."
"녜, 그저 지당하신 분부시오나, 대매에 물고가 나는 한이 있사와도 소인은 결단코 도적놈은 아니옵고……."
하고 제 본색을 까바칠까말까 망설이면서 먼발치에 쭈그리고 앉아 있는 제 동행을 힐끗힐끗 돌아다본다.
주만은 궁금증이 더럭 났다. 그 말씨와 거동으로 보아 딴은 행내기 도적놈은 아닌 듯도 하였다.
"대관절 네가 누구란 말이냐."
"녜, 소인 같은 놈의 성명을 여쭈어도 고귀하신 아가씨께서 알아들으실 리 만무하옵고 그저 살려 주시는 셈치시고 제발 덕분에 털이를 보내시어 댁 하인을랑 깨우지 마시옵소서."
털이 이름까지 아는 것은 더욱 신기하였다. 도적놈이 땅바닥에 엎디어 비대발괄할 때부터 털이는 겨우 두근거리는 가슴을 가라앉히고 제 아가씨 곁으로 바싹 다가들어 진기한 도적놈의 하소연을 듣고 있다가 도적놈이 제 이름을 부르는 데 귀가 번쩍 띄었다. 인제는 아까 콩만하던 간이 주먹만큼 커져서 말을 몰아 주만의 앞을 막아서며,
"이 녀석, 너는 웬 녀석이기에 남의 이름을 함부로 부르느냐."
하고 제법 호령조로 묻는다.
땅바닥에 이마를 비비대고 있던 도적놈은 털이가 앞을 나서니 고개를 번쩍 들어 그 눈딱지를 사납게 굴리면서 그래도 말씨만은 그렇게 거칠지 아니하였다.
"아무리 이 지경이 되었기로 너까지 이 녀석 저 녀석 한단 말이냐. 욕지거리를 못 하면 말을 못 하느냐."
"도적놈에게 누구는 욕을 못 할꼬, 매친 녀석."
"어 그렇게 입을 마구 놀리는 법이 아니래도."
"법! 네까짓 녀석이 법을 다 찾는단 말이냐. 아이 우스워라. 도적놈이 법을 찾으니 참 귓구멍이 막힐 노릇이다. 그래 법을 아는 녀석이 밤중에 남의 담을 뛰어넘어."
"어, 도적놈이 아니래도 또 그러네. 제발 좀 아가리를 닫치고 아가씨나 모시고 들어가게."
"이 녀석이 그래도 말버릇을 못 고치고 하게는 또 누구더러 하게야. 내 그럼 앞대문으로 돌아가서 소리를 지를 테다."
털이는 아주 기고만장이다.
"얘 아서라, 아서. 그건 제발 좀 말아 다오."
"이 녀석이 그래도 반말지거리야. 도적놈이 아니거든 어서 네 명색이나 대라."
도적놈은 털이와 실랑이를 해야 별 소득이 없을 줄 깨달았는지 다시 주만에게 향하여,
"아가씨 구슬아가씨, 소인은 물러갑니다. 안녕히 주무십시오."
하고 몸을 일으켜 꽁무니를 빼려 하였다.
"가기는 어디를 간단 말이냐. 어디 가게 되는가 두고 보자."
털이는 가로막고 정말 말을 돌려 앞대문으로 돌아갈 기세를 보이었다. 도적놈은 뛰어와서 털이의 말고삐에 매어달렸다.
"아가씨 털이아가씨, 제발 좀 살려 주. 허허, 내가 이 무슨 죽을 수란 말인고."
기가 막힌다는 듯이 너털웃음을 웃는다.
"네깐 녀석에게 누가 아가씨 소리를 듣고 싶다더냐. 네 명색이나 일러라."
하고 나서 주만을 돌아다보고,
"암만해도 하인들을 깨울 수밖에 없습지요. 이런 녀석들은 버릇을 가르쳐 놓아얍지요."
동의를 구하였다. 주만이도 하는 양을 보려고 고개를 끄덕여 보이었다.
막다른 골목에 들어서자 도적놈은 털이를 흘겨보고 뇌까리었다.
"쉬쉬 말이란 함부로 하는 게 아니다. 주둥아리를 조심해라."
하고 제 동행을 눈으로 가리키며 눈껌쩍이를 해보이었다.
"쉬쉬? 이 녀석, 어디 뱀이 지나가느냐. 말이란 도적놈 보고 도적놈이라고 하는 게란다."
털이도 지지 않는다. 도적놈은 곱다랗게 놓여 가기는 이왕 틀린 줄 알고 제 본색을 알리는 것이 도리어 나을 줄 깨달은 모양이었다. 갑자기 태도를 고쳐 털이를 꾸짖었다.
"이년, 요망스러운 년. 쉬쉬, 이 행차가 어느 행차시라고. 금지 금시중 댁 서방님 행차시다. 어느 존전이라고 입을 함부로 놀리느냐."
하고 어깨를 으쓱하며 한번 뽐내 보이었다.
"금시중 댁 서방님?"
털이는 잠깐 놀라는 눈치였으나,
"오 그렇더냐. 그러면 진작 그런 말을 할 게지, 미련한 녀석."
하고 도리어 나무란다.
주만은 놀라지도 않았다. 아까부터 기연가미연가 생각하던 것이 바로 맞은 줄 알았을 뿐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