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만과 털이는 술시가 훨씬 겨워서야 사초부인의 잠든 틈을 타가지고 빠져나올 수 있었다. 주만의 급한 분수로는 한시가 바빴지만, 털이 혼자만 보내자니 어쩐지 마음이 놓이지 않고, 둘이 한꺼번에 몸을 빼자면 이목이 번다한 낮보담 암만해도 밤을 택하는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털이는 말 한번 실수한 죄로 더 상냥스럽게 더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고 모든 일을 아귀가 맞도록 꾸며 놓았다. 말과 수레 구종들을 쩍말없도록 얼러맞추어 미리 말 안장을 지어 두도록 부탁도 해놓고 초와 초롱까지 준비를 하였다.
불국사에서 상서골까지 가자면 이십 리 길도 넘었다.
주만은 어려서부터 말을 타본 솜씨라 말고삐를 손수 거사려 잡고 털걱털걱 등자를 굴리는 양이 조금도 서툴지 않았다.
으슥한 형제산 기슭을 돌 제 털이는 머리끝이 쭈볏쭈볏하고 찬 소름이 끼치었지만, 주만은 구슬 채찍을 번뜩여 말을 채치며 부랴사랴 닫는다. 초롱을 들고 앞장을 섰던 털이가 순식간에 뒤로 뚝 떨어져서, 펄펄 날리는 주만의 옷자락이 눈앞에 아물아물해진다.
털이가 기를 쓰고 말을 채질하여 따라가느라고 애를 썼으나, 말도 털이쯤은 업신여기는지 제멋대로 이리 뛰고 저리 뛸 뿐이요, 도무지 말을 잘 들어주지 않는다.
"아가씨, 아가씨! 제발 좀 천천히 갑시오. 쇤네가 불을 들었으니 쇤네가 앞장을 서야 될 것 아닙시오."
털이는 죽을 상을 하고 소리소리 불렀다.
주만은 털이의 외치는 소리를 듣고서야 비로소 제 동행이 있는 것을 깨달은 듯 펄펄 뛰는 말을 멈추었다. 말은 한번 곤두섰다가 걸음을 멈추는데 화화 내뿜는 숨길이 흰 안개처럼 달빛에 서리인다.
"얘 얼핏 좀 오지를 못하니. 굼벵이보담도 더 꿈지럭거리는구나."
주만은 털이를 돌아보고 웃는다.
"애구 죽겠습니다. 애구 죽겠습니다. 빌어먹을 말이 세상 말을 들어얍지요."
털이는 숨이 턱에 닿으면서도 쫑쫑 말대답은 잊지를 않는다.
"제가 탈 줄 모른다고는 않고 그래도 말 탓만 하는구나."
주만은, 말등에서 미끄러져서 말 궁둥이 쪽에 매어달린 듯이 앉아있는 털이의 어색한 모양을 보고 우스워서 못 견디었다.
"파리나 모기 모양으로 차라리 말꼬리에 붙어 가는 것이 나을 것을, 오호호."
"수레채를 잡고 걸어갈지언정 말이란 세상 못 탈 것인뎁시오."
털이는 빡빡이 흐른 땀을 소맷자락으로 문지르며,
"초롱은 괜히 준비를 했는뎁시오. 거추장만 스럽고, 아가씨는 불 든 년을 뒤다 세우고 그냥 살같이 달아나시니."
"딴은 초롱이 아무 소용이 없겠다. 달이 이렇게 밝으니 접어 두는 것도 좋겠다."
주만의 말마따나 과연 달은 밝았다. 이내 자욱한 십팔만 호 위로 달빛은 물 위의 기름처럼 빙빙 도는 듯하였지만, 솟을추녀〔飛畯〕에 아롱새긴 금박이와 은박이가 번쩍번쩍하는 것까지 완연히 보이었다.
길가에 인적은 끊어진 지 오래였지만 어디선지 와글와글하는 소리가 잉잉 귀를 울리고 훈훈한 사람의 훈기가 들 밖 공기를 마시고 오는 신선한 코 안으로 와락 안긴다. 그들은 벌써 서울 한 모서리에 들어선 것이다.
사천왕사의 긴 담을 돌아들자 주만과 털이는 달리던 말을 천천히 몰며 가쁜 숨길을 돌리었다. 인제 햇님다리만 건너서면 집을 다 온 것이다.
주만이도 이마에 맺힌 땀방울을 씻었다. 그러고 털이를 보며,
"얘 우리 어디로 들어갈까. 앞대문으로 들어가면 왁자지껄하지 않겠니."
"글녓시오. 아닌밤중에 달려들면 하인들도 무슨 큰일이나 난 줄 알고 놀랄걸입시오. 더구나 대감께서 아시고 보면 꾸중을 않으실깝시오."
"그야 절에 갔다가 온다고 여쭈면 그만이겠지만, 아무튼 별당 뒷문으로 돌아 볼까."
"글녓시오. 거기도 필경 문이 잠겼을 게고 원체 안과 동안이 뜨니 부르는 소리를 잘 알아들을깝시오. 잠이 들면 다 죽은걸입시오. 원 잠귀들이 어두워서."
"그래도 뒤를 돌아 보았다가 정 안 깨거든 하는 수 없이 앞대문으로 다시 가서 불러 볼밖에."
주종은 이렇게 작정을 하고 뒤꼍으로 돌았다. 이번에는 앞장을 서서 가던 털이가 별안간,
"애구, 저것 봅시오, 저것."
죽는 소리를 하고 하마터면 말에서 떨어질 뻔을 하였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