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40

주만은 턱없는 눈물을 보이지 않으려고 외면을 하고 가까스로 마음을 진정한 뒤에 다시 그 벗겨진 뺨 언저리를 들여다보았다. 생각한 것보담 상처는 그리 대단치 아니하였다. 앞으로 고꾸라질 때 돌에 코를 부딪혀 코피가 터지고 뺨 언저리가 돌결에 스쳐서 벗겨졌을 따름이요, 생채기가 그렇게 깊지는 않았던 모양이다.
아사달의 눈엔 차차 흐릿한 기운이 걷히고 정신이 돌아나는 듯하였다. 그 어글어글한 아름다운 눈매는 웃는다. 고맙다는 뜻을 알려 줌이리라.
"상처가 쓰라리지는 않으셔요."
주만이가 맨 처음으로 아사달에게 묻는 말씨다. 이 평범한 말 한 마디가 어쩌면 그렇게 나오기를 어려워하였을까.
"아닙니다. 괜찮습니다."
조금 잠긴 것 같았지만, 목소리는 역시 청청하다.
주만은 호 하고 또 한번 숨을 크게 내어쉬었다. 비록 간단한 대답이나마, 말문이 닫혔으려니 하였던 그의 입에서 나오는 것이 얼마나 신기하고 든든한가. 저절로 안심의 숨길이 내쉬어진 것이리라.
"머리가 아프진 않으셔요."
하고 주만은 제 손을 들어 병인의 머리를 짚어 보려다가 슬쩍 옆을 살피었다. 매우 짧은 동안이나마 어느결엔지 단둘의 세계를 이루어 옆에 사람이 있고 없는 것을 깜박 잊었었다. 그러나 눈치 빠른 털이는 어느 틈에 빠져나갔는지 자리에 없었다.
주만은 마음놓고 제 손을 병인의 머리 위에 얹을 수 있었으되, 그 손이 가늘게 떨리는 것을 어찌할 수 없었다.
손바닥에 촉촉하게 땀이 배고 호끈호끈 다는 것을 보면 아직도 머리가 열에 뜨인 탓이리라.
"머리가 더운데요."
주만은 걱정스럽게 물었으나, 이번에는 아무 대답이 없다. 그 눈은 어느새 꾸벅꾸벅 졸음이 오는 것 같다. 얼마 안 가서 코까지 골고 병인은 혼혼히 잠의 나라로 떨어져 들어가고 만다.
주만은, 마치 제 누이나 다름없이 턱 맡겨 버리고, 아무 거리낌없이 잠이 드는 아사달의 태도가 어떻게 믿음직하고 흐뭇한지 몰랐다.
그러나 아사달의 잠이 깊이 들자 주만은 도리어 휘젓한 생각이 났다. 아무도 없는 방 안에 단 두 남녀가 있는 것도 실없이 불안한 생각을 자아내는데, 더구나 하나는 자고 하나는 잠든 이의 머리를 짚고 앉았다는 것이 누가 보면 겸연쩍을 것 같았다.
주만은 머리에서 손을 떼고 반쯤 몸을 일으켰다가 그 하붓이 열린 입술에 핏기 하나 없고, 그 눈시울 언저리가 눈에 뜨이도록 꺼져 보이는 것이 차마 혼자 남겨 두고 나올 수가 없었다.
그것은 너무도 몰풍스럽고 매정스러운 노릇인 듯하였다. 그는 천리타향의 외로운 나그네가 아니냐. 부모도 처자도 없는 낯선 곳에 병들어 누운 몸이 아니냐. 우리 서라벌, 아니, 우리나라에 큰 보배가 될 탑을 하나도 어려운데 둘씩이나 쌓아 올리다가 일터에서 쓰러진 그가 아니냐. 그의 몸을 돌보아 주고 병을 구원해 주는 것이 사람으로 떳떳이 할 일이거늘 부끄러울 것이 무엇이며 겸연쩍을 것이 무엇이랴.
누가 자기를 탄한다 하더라도, 아니 온세상 사람들이 손가락질을 하고 흉을 본다 하더라도 조금도 두려울 것도 없고 거리낄 건덕지도 없으리라 하였다.
주만은 다시 눌러앉았다.
아사달은 인기척에 놀랐던지 별안간 눈을 번쩍 뜬다. 제 머리를 짚어 주는 주만을 생전 처음 보는 것처럼 이윽히 쳐다보다가 입을 열었다.
"누, 누구시오." 주만은 무망중이라 서먹서먹하고 미처 대답을 못 하고 있노라니,
"나를 어, 어떻게 아셨습니까."
병자는 잽처 또 묻는다. 주만은 짚었던 손을 떼고 얼굴을 붉히었다. 의당히 물을 말은 물을 말이건만 자기의 주책없고 지나치게 부니는 것을 책망이나 하는 것 같았다.
자기는 이손 유종의 딸 주만이라는 것과, 전번 파일 거둥에 불국사에 왔다가 왕께서 부르시어 먼빛으로나마 아사달을 보았다는 것과, 어젯밤에 탑 구경을 올라갔다가 아사달이 까무러친 것을 보았다는 것을 띄엄띄엄 일러주었다.
병인은 말 구절구절마다 고개를 끄덕일 뿐이요, 제 말은 한마디도 티를 넣지 않았다. 다만 그 눈치와 얼굴로 보아 아사달에게는 모두 처음 아는 사실인 모양이었다.
그리고 주만이 제 자신도 이상한 것은 정작 파일날 밤에 같이 다보탑을 돌았다는 얘기를 빼놓은 것이었다.
그 말을 마저 할까말까 망설이는 판에 털이가 문을 빠끔히 열고,
"아가씨, 아가씨."
하고 가만히 불렀다. 그러면 털이는 방에서 나와 가지고 여태까지 문 앞을 지키고 서 있었던 것이리라. 주만은 쫓아 일어나 나왔다.
"아가씨, 저기 차돌이가 뭐 자실 것 가지고 오는데 여럿이 따라 들옵니다."

무영탑 - 04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