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39

홀로 외따로 누웠거니 생각을 하고 있다가 난데없는 사람 소리를, 더구나 여자의 목청을 듣고 아사달은 깜짝 놀라며 그리로 고개를 돌리었다.
제 옆에서 열 뼘도 안 떨어진 저만큼 웬 처녀 둘이 앉아 있지 않은가.
그 중에 한 처녀는 어디선지 본 듯한 얼굴이었다.
'내가 저이를 어디서 보았누.'
흐릿한 기억을 더듬으며 아사달은 궁금증을 내었다. 그래도 얼른 생각이 나지 않는데 두 처녀는 불시에 몸을 일으키어 제 머리맡에 와서 앉는다. 아사녀의 몸에서 나던 그 향기를 아낌없이 풍기면서.
'오, 옳지 그 향기가 바로 이 처녀들에게서 난 게로구나.'
아사달은 어리둥절하면서도 향기의 출처를 터득하였다.
"인제 좀 어떱시오. 괜찮습시오."
낯선 처녀는 바싹 대어들듯이 다가앉으며 묻는다.
'무에 어떠하단 말인가. 괜찮다는 것은 또 뭣을 가리키는 것인고.'
아사달은 웬 영문인지 말귀를 알아들을 수 없었다.
낯익은 처녀는 가까이 오기는 왔으나 물끄러미 들여다만 볼 뿐이요, 아무 말이 없다. 그 목단화 송이 같은 번화한 얼굴 바탕에 어울리지 않게 화색이 걷히고 슬픈 빛이 가득한 것이 대자대비의 관세음상을 생각나게 하였다. 그러나 관세음상이라면 그 눈은 너무 정다웁고 너무 생기가 도는데 자기를 한없이 안타까워하고 한없이 애처로워하는 눈치다. 아사녀의 자기를 보는 눈에서나 이런 눈치를 더러 본 듯싶었다.
'어디서 꼭 본 것 같은데 어디서 보았을까?' 아사달은 또 뇌어 보았다.
'옳거니, 파일날 밤 다보탑에서 보았구나.'
마침내 황연대각을 해내었다. 그때 여불없이 제 아내의 환영으로 속았던 그 처녀가 분명하다. 그리고 보니 그 윗입술이 조금 짧은 듯한 입 모습 언저리든지 갸름한 판국이 연신 제 아내와 같은 점도 없지 않아 있어 보이었다.
'그 처녀가 어찌 또 여길 왔을까. 혹은 내가 그 처녀의 집에 누워 있는 것이나 아닌가.'
아사달의 생각은 다시금 알쏭달쏭해진다.
'이게 생시가 아니고 모두 꿈이어니.'
생각해 보매 딴은 길고 깊은 꿈속을 거쳐 나온 듯도 싶고 아직 헤어나지를 못한 것도 같았다.
그러고 또 아사달을 놀라게 한 것은 그 낯익은 처녀가 눈물을 흘린 것이다.
그 처녀는 참고 참은 모양이었으나 끝끝내 구슬 같은 눈물이 연잎에 빗방울처럼 그 뺨을 구을러 떨어지고야 만다. 뒤미처 곧 눈물을 닦고 닦았으나 그 속눈썹이 은가루를 뿌린 듯 번쩍이고 어룽진 뺨이 마치 이슬에 촉촉히 젖은 꽃잎 같은 것도 천연 이별하던 날 밤에 아사녀가 숨어 울던 것과 같았다.
'저 처녀가 왜 울까.'
아사달은 괴이쩍게 생각은 하면서도 그 눈물이 자기를 동정하는 것인 줄을 어렴풋이 깨닫고 그윽하나마 고마운 정이 움직이었다.
두 처녀는 물론 주만과 털이였다.
그들은 어젯밤 석가탑 위에서 까무러친 아사달을 발견하고 곧 절안을 혼동시켜 기절한 이를 엇메어다가 제 방에 갖다 눕히었다.
의술도 짐작하는 아상노장이 창황히 달려와서 기절한 이의 수족과 등과 배를 주물러 보고 과로한 탓으로 잠깐 기절한 것이지 큰 염려는 없다 하였다.
과연 얼마 만에 까무러친 이는 겨우 숨길을 돌리었다. 우 모이었던 중들은 뿔뿔이 헤어지고 맨 마지막으로 아상노장은 또 한번 기절한 이의 머리와 맥을 짚어 보고 몸을 일으켜 나오다가 그때까지 서성서성하고 있는 주만과 털이를 보고,
"오늘 밤에 두 분이 많이 애를 쓰셨소. 만일 두 분이 아니었던들 우리는 까맣게 모를 뻔하였소. 그것도 전생의 인연이오. 인제는 피어났으니 다른 염려는 없을 듯하오."
치사하는 말을 남기고 육환장을 끌며 천천히 걸어간다.
주만과 털이도 남 다 헤어지는데 자기들만 처져 있자는 수도 없어 그 방을 나오기는 나왔으나 주만은 차마 발길이 돌아서지를 않는다. 아무리 아상노장이 염려는 없다 하였지마는 아직 쾌히 깨어난 것도 아니니 언제 무슨 일이 있을지 어떻게 알랴.
아까는 여럿이 몰려 들어가는 판에 휩쓸리어 들어가기도 갔지만, 더구나 기절한 것을 맨 처음 발견한 사람으로 그 자리에 참례하는 것이 인정에도 떳떳한 일이라 조금도 어색하지를 않았었다. 그러나 지금 새삼스럽게 들어간다는 것은 차돌의 보기에도 수상쩍을 것 같았다.
하릴없이 치워 놓은 자기네 처소로 돌아왔다가 얼마 안 남은 밤을 앉아서 밝히고 다시 털이를 데리고 나왔다.
털이의 염탐으로 차돌이가 아침 공양 짓는 데 시중 들러 나간 새를 타서 그들은 다시 들어오게 된 것이었다.
아사달이 눈을 뜬 것은 그들이 들어온 지 한참 만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