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38

아사달은 까무러친 그 이튿날 아침에야 겨우 깨어났다.
아리숭아리숭한 머리 가운데 한창 흥이 겨워서 겨누를 휘두르고 정을 들 만치는 모양이 저 아닌 다른 사람과 같이 떠올랐다.
그 신이 난 잔 가락 굵은 가락이 잉잉 하니 귓결에 울리며 제 몸은 반공에 둥둥 솟아 일렁일렁하는 듯하다.
돌불이 번쩍번쩍 흩어지는 대로 눈동자만큼씩 한 수없는 아사녀의 모양이 마치 콩 튀듯 튀어올라 핑핑 내어둘리는 눈끝에서 뱅글뱅글 매암을 돈다.
'내가 왜 이러고 누워 있을까?'
그는 문뜩 이런 생각을 하였다. 저 아닌 아사달은 저렇게 일을 하느라고 곱이 끼었는데 저는 번듯이 누워서 핀둥핀둥 노는 것이 송구스러웠다.
'한창 흥이 나는 판인데 나는 왜 이러고 누워 있을까. 이 드물고 소중한 시각에 나는 왜 한만히 쉬고 있을까. 몇 번 손질이면 석가탑의 삼층이 끝날 것이 아닌가. 돌결이 그렇게 고분고분하게 말을 잘 듣는 터이거늘 나는 어느 틈에 드러눕고 말았을까…….'
수없는 아사녀의 모양이 하나씩 둘씩 엉겨붙더니 다 자란 아사녀가 되어 뒷걸음질을 치고 멀리멀리 달아나며, 한창 바쁘게 일을 하고 있는 저 아닌 아사달을 손짓하여 부른다.
'저것 보아, 아사녀는 저렇게 부르지 않는가. 저 사람의 겨누와 정을 든 팔은 그렇게 번개같이 놀지 않는가. 그런데 내 몸은 왜 여기 늘어져 있을까.'
암만해도 무슨 곡절인지 알 수가 없으나 아무튼지 자기가 일을 집어치우고 만 것만은 틀림이 없었다.
"그때 일을 끝내었던들 나는 벌써 훨훨 날아갔을 것이 아닌가. 지금쯤은 우리집 사립문을 삐걱삐걱 열 것이 아닌가. 그러면 아사녀는 엎드러지며 고꾸라지며 뛰어나올 것이 아닌가. 아무 거리낌없는 내 방에서 네 활개를 퍼더버리고 실컷 마음껏 쉴 수 있을 것 아닌가."
그는 그 동안을 못 참아서 여기 쓰러져 버린 제 몸이 한량없이 괘씸스러웠다.
'어서 일어나야지.'
하고 그는 몸을 추스르려 하였다. 그러나 웬일인지 그의 몸은 나른하게 풀어져서 손가락 끝 하나 오그릴 수도 없었다.
마치와 정이 제 자국에 맞지를 않아서 화증을 내던 것이 인제 와서 또렷또렷하게 생각이 난다.
'옳거니 그때 내가 화증이 나는 김에 마치를 휘갈겼거니. 그리고 그 다음에는…….'
생각의 실마리가 풀릴 듯 풀릴 듯하면서도 또다시 갈래를 잡을 수 없다. 그 후에 얼마를 일을 더한 것도 같고 탑 위에 그냥 쓰러진 법도 하다.
'마치를 휘갈기고 나서…….' 끝이 아물아물해지려는 그 생각을 붙들고 그는 다시금 곱씹어 보았다.
암만해도 그 뒷일은 어찌 되었는지 알 수는 없으나, 공중에 둥실 떠 있는 듯하던 몸이 차차 가라앉는 듯하며 뼈마디가 얼얼하였다.
그러자 문득 아사녀의 냄새가 난다. 숨을 들이쉬는 대로 그 감칠 듯한 향기는 모랑모랑 피어나서 콧속으로 흘러들어 피 방울방울에 스며든다.
육지에 뛰어오른 물고기가 오래간만에 물맛을 보는 것처럼 그는 가슴을 벌룸벌룸하며 숨을 크게 내쉬고 들이쉬었다.
아아 향기! 아사녀의 향기! 삼 년이나 길고 긴 세월에 한 번도 맡아 보지 못한 그 향기. 주리고 주리던 그 향기.
과연 그는 이 향기에 주리었다. 그립고 그리운 아내의 얼굴은 비록 환영일망정 때때 그의 눈에 밟히었지만 아사녀의 현실의 몸이 아니면 발할 수 없는 이 향기가 현실로 그의 코 안으로 기어들 까닭은 없었다. 그는 대공을 마치고 어느결에 아사녀의 옆에 와 누워 있는가.
아사달은 눈을 두리번두리번하였다.
헌털방이 다된 제 벙거지가 걸려 있는 바람벽만 보아도 갈 데 없는 불국사 제 처소가 분명하거늘 이 향기는 도대체 어디에서 흘러오는가.
아사달은 바로만 두었던 고개를 돌리어 뚤레뚤레 살피려 하였다. 그러자 귓결에서 별안간 꾀꼬리 같은 여낙낙한 음성이 들려 왔다. 그는 사내들 틈바구니에서 날을 보내었고, 여자의 목소리를 듣는 것도 오래간만이었다.
"아가씨, 아가씨, 구슬아가씨. 저 좀 보십시오. 그 어른이 고개를 돌리시는군요. 눈을 뜨시고 인젠 아주 깨어를 나셨군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