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37

주만과 털이는 석가탑 앞에 와 걸음을 멈추었다.
"아하, 아주 늘어지게 한잠이 드셨는걸입시오. 쇤네가 올라가 볼깝시오."
털이는 다짜고짜로 거기 놓인 사다리에 한 발을 얹으려 하였다.
"얘, 주무시면 조금 있다가 다시 오는 게 좋지 않니."
"글녓시오. 온종일 일을 너무 많이 하시어 고단도 하실 테니."
털이도 이번에는 순순히 이르는 대로 들었다. 아무리 주책없는 털이라도 생면부지의 사내가 자는 것을 덮어놓고 깨워 일으키자는 염의는 없었다.
그들은 가만히 발길을 돌렸다. 마치 자기네의 자국 소리에 자는 이의 고단한 잠이 깨일까 두려워하는 것처럼.
털이는 앞장을 서서 성큼성큼 걸어가는데 주만은 무엇이 마음에 켕기는지 다시 돌쳐선다. 어슴푸레한 빛을 통하여 그는 뚫어지게 탑 위를 쳐다보며 움직이지 않는다.
"언제는 도로 가자시더니 왜 그리고 서 곕시오. 그래도 차마 발길이 떨어지시지를 않습시오, 히히."
앞을 서서 가다가 제 주인의 뒤따르는 기척이 나지 않으매 힐끈 돌아다보고 털이는 또 우스개를 걸었다.
주만은 털이의 버릇없는 우스개도 귀에 들어오지 않는 듯 한동안 뿌리가 박힐 듯이 서 있다가 손짓으로 털이에게 가까이 오라는 뜻을 보이었다.
"얘, 암만해도 이상스럽구나. 주무신다 한들 어찌 저렇게 기신도 없이 주무실 리야 있겠니."
과연 돌 위에 늘어져서 등 언저리가 어쩐지 푹 꺼져 보이는 게 보통 잠자는 사람으로는 너무도 종용해 보이었다.
털이도 제 주인의 목소리가 무슨 불길한 조짐을 느낀 것처럼 약간 떨리는 것을 듣자 심상치 않다는 듯이 발을 사르르 미는 듯이 다시 돌쳐서 제 상전을 따라 탑 위를 말끄러미 바라보다가,
"딴은 좀 이상한뎁시오. 그냥 주무시기만 한 다음에야 저렇게 퍽 엎어져 계시지는 않을 성싶군요."
"그리고 마치를 그대로 들고 있는 것도 수상하지 않으냐. 저렇게 고단하게 잠이 든다면 쥐었던 것을 으레 놓을 텐데."
"그야 쥐고 자는 수도 있겠습지요만 아무튼 궁금하니 쇤네가 좀 올라가 볼깝시오."
주만도 이번에는 말리지 아니하였다.
털이는 휘청휘청 사다리를 부여잡고 발발 떨면서 올라갔다.
어른어른하는 달빛에서 그 방구리 같은 몸을 꼬불랑꼬불랑하며 털이는 이리 갸웃 저리 갸웃 늘어진 이의 이모저모를 자세자세 들여다보고 있다가,
"에구머니나!"
버럭 외마디 소리를 지른다.
"응?"
하고 주만도 깜틀 하며 사다리 앞으로 한 걸음 바싹 다가들었다.
"이거 크, 큰일났습니다. 이 뺨에 피, 피가……."
"응, 피가!"
하고 부르짖을 겨를도 없이 주만은 나는 새와 같이 사다리를 날아올랐다.
"어디, 어디냐."
올라서는 길로 주만은 허둥지둥 묻는다. 아사달의 오른편 뺨과 돌이 맞닿은 어름을 들여다보고 있던 털이는,
"여길, 여길 봅시오."
하고 손가락으로 제 보던 자국을 가리킨다.
주만은 미처 치마폭도 못 거두고 올라온 탓에 발이 치맛단에 휘감기어 하마터면 고꾸라질 뻔하였다.
달빛은 아무리 밝다 해도 흐릿한 탓에 빛깔 같은 것이 또렷또렷하게 나타나지를 않는다.
털이는 재빠르게 제 손을 그 뺨과 돌 사이에 집어넣었다가 꺼내며,
"이것 봅시오. 눅눅하게 묻는뎁시오."
하고 무슨 물기가 도는 제 손가락 끝을 비비어 보인다.
살에 묻은 피는 더구나 잘 알아볼 수가 없었다.
주만은 급한 마음에 제 치마폭을 꾸김꾸김 꾸겨 쥐고 그 뺨과 돌을 훔쳐 내어 달빛에 펴서 비춰 보고,
"피가, 피가 분명코나."
마침내 단정을 내리었다.
"이걸 어째, 이걸 어째요."
털이는 쩔쩔매었다.
"얘, 몸을 좀 흔들어 보렴."
"여봅시오, 여봅시오."
털이는 넘어진 이의 귀에다 대고 소리를 지르며 등을 흔들어 본다.
"어규, 어째 살이 단단한 것이 굳은 것 같은뎁시오."
주만은 그 자리에 털썩 주저앉아서 아사달의 코에다가 손을 대어보았다. 그윽한 숨길이 있는 둥 만 둥한데 손을 쥐어 보니 마치 얼음장같이 싸늘하다.
"이를 어떡하나." 주만의 눈에서는 괸 때 모르는 눈물이 쏟아진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