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36

주만과 털이는 다보탑을 한 바퀴 휘 돌아보았다.
눈이 어리는 아름다운 그 모양이 전보다 한결 더 정다웠다. 홑으로 묵묵한 돌이 아니요, 숨길이 돌고 맥이 뛰는 생물인 양 주만을 반기어 맞는 것 같다. 그 연연한 입술을 열어 그리고 그리던 회포를 하소연하는 듯하다. 그 부드러운 가슴을 헤치고 아늑하게 안아 주는 듯하다.
이 탑의 둘레를 돌고 또 돈 지가 단 며칠이 안 되건만 주만에게는 해포가 넘는 것 같았다. 햇수조차 따질 수 없는 까마득한 옛날인 것도 같았다.
그날 밤보담 더 밝고 더 둥근 달이 역시 그날 밤 모양으로 탑의 몸에 서리었다.
주만은 서성서성하며 차마 발길을 못 돌리고 있노라니 털이는 옆에서 재재거리기를 말지 않는다.
"왜 오늘 밤에도 탑돌기를 또 하시렵시오. 왜 또 여기 이러고만 계십니까. 어유, 쇤네는 생각만 해도 진절머리가 나는뎁시오. 정말 쇤네는 그날 밤에 죽을 고를 치른걸입시오. 몇 바퀴를 돌았는지 어디 헤일 수도 없지. 그러니 이년의 발목쟁이가 성할 겁니까. 그때 시큰거리기 시작한 게 입때 낫지를 안했답니다."
하고 털이는 절름절름 절어 보인다. 달 비친 땅 위에 땅달보 같은 그림자를 그리고 낑낑 매며 돌아가는 것이 허리가 부러지도록 우스운 꼴이었으나 주만은 낄낄대고 웃기는 싫었다.
"여기 이러고 밤을 새우시랍시오. 어서 가보십시오."
제가 재롱을 떨어도 알은체를 안 해주는 데 적이 흥이 깨어진 털이는 절름발이 놀음을 그치고 잠깐 입을 닫았다가 또 보챈다.
시름없이 달만 쳐다보고 있던 주만은 성가신 듯이,
"가기는 또 어디를 가잔 말이냐."
"아니 고작 이 다보탑을 보시랴고 그 애를 쓰시고 여길 오셨단 말씀입시오. 저 석가탑으로 어서 가보셔야 될 것 아닙시오."
"석가탑으로?"
주만은 무심코 말을 받는다.
"그러면입시오. 거길 가셔야 만나실 분을 만나실 것 아닙시오."
"……"
주만은 다시 달만 쳐다본다.
"어서 좀 가보십시오. 나도 모시고 갈게."
"무에 그리 급하냐."
그렇게 급하던 마음이지만, 정작 예까지 오고 보니 축 늘어진다.
갈까말까. 지금 와서 새삼스럽게 망설여진다. 단 한 번만 보아도 원이 풀릴 것 같더니만 그대도록 중난하던 원을 이렇게 쉽사리 풀 수 있게 되었거늘 가슴은 왜 이리 답답한가. 여기서 몇 걸음을 뜨지 않아 '그이가 있구나' 하는 생각만 해도 얼굴은 왜 이렇게 화끈거리는가…….
"언제는 그렇게 서두시더니 인젠 또 급할 게 없단 말씀입시오. 아가씨도 알고 보니 여간 변덕쟁이가 아니시군."
털이는 이번 일에 제 공이 이만저만이 아닌 것을 믿고 함부로 지싯거리고 말씨도 마구잡이다.
"그 어른이 거기 꼭 계실 줄 네가 어떻게 꼭 안단 말이냐."
빈말뿐이 아니요, 참으로 주만에게 이런 생각이 지나갔다. '거기 가면 그이가 있거니' 하고 믿기는 하였지만 꼭 있다고야 어찌 장담하랴. 혹은 없을는지도 모른다. 만일 없다면!
'있거니' 할 때는 마음이 조려붙기는 하였으되 느긋하고 든든하더니 '없거니' 하매 별안간 속이 텅 빈 듯이 헛헛해지며 부랴사랴 뛰어가 보고 싶었다.
"그 탑에 꼭 계시구말구. 벌써 다 알아본걸입시오. 그 방에서 시종 드는 차돌이란 아이놈에게 넌지시 다 물어 보았답니다. 어서 가시기나 하십시오."
하고 털이는 주만의 등채를 밀다시피 한다.
몇 걸음을 걷지 않아 석가탑 위에 사람이 있고 없는 것을 분명히 알아보게 되었다.
"저기를 보십시오. 그 어른이 마치를 들고 일하시는 게 보이지 않습시오."
털이는 내 말이 어떠냐 하는 듯이 연방 손가락질을 하며 가리켜 준다.
실상 털이보담 주만이가 먼저 보았다. 희미한 달빛 아래 아사달이 마치를 쥐고 돌 위에 꾸부리고 있는 것을.
"얘, 그런데 어째 돌 다듬는 소리가 들리지를 않니."
주만은 주춤 걸음을 멈추고 귀를 기울여 본다.
"글녓시오." 털이도 들어 보다가,
"참 소리가 안 나는군요. 차돌의 말을 들으면 어두운 밤에도 일을 잘 하신다던데."
하고 째기눈을 뜨고 이윽히 바라보더니만 또 깔깔댄다.
"저길 좀 봅시오. 얼굴을 돌멩이에 비비대시고 아주 한잠이 드셨군요. 그 맨바닥에, 으흐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