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30

놀이가 내어온 두 번째 주전자를 금성은 빼앗는 듯이 받아서 들어 보더니,
"이번에는 꽤 묵직하구나."
하고 입이 헤벌어지려다가 말고 다시 새침하게 다물어 버린다. 붓고 마시고, 붓고 마시고, 두 번째 주전자도 거의 다 비어 가건마는 금성은 웬일인지 술취한 낌새도 보이지 않는다.
놀이는 속으로 이상한 일도 있구나 싶었다.
여느 때 같으면 벌써 해갈을 떨 것 아닌가. 자기를 끌어당기고 무릎 위에 올려놓았다가 내려놓았다가 그 술내나는 입술을 비비대었다가…… 몸서리나는 주정으로 남을 못살게 굴 것 아닌가.
그런데 오늘 밤에는 주정은커녕 농담 한마디 걸지 않고 아주 못마땅한 눈치를 보이며 이따금 제 눈길과 마주치면 슬쩍 외면을 해버린다.
매도 먼저 맞는 놈이 낫다는 격으로 이왕 받을 주정이면 어서 받고 마는 것이 도리어 속이 시원할 듯하였다. 이렇게 시침을 떼고 점잔을 빼고만 있으니 나중에 무슨 벼락이 어떻게 떨어질지 몰라 마음이 조마조마하고 송구스러웠다.
또 한 주전자를 더 내어왔다.
그 맹숭맹숭한 얼굴이 하얗게 시어서 철색이 지고 꼬부장한 어깨를 연방 추스른다.
"아이그, 무슨 술을 이렇게 많이 잡수십시오. 큰일나겠네."
놀이는 보다가 못하여 이런 말을 하고 고만 술상을 치우려 하였다. 전 같으면,
"그럼 그럴까."
하고 그 음탕한 눈을 지끗지끗하며 곧잘 말을 듣는 서방님이었다. 그러나 오늘 밤은 댓바람에 역정부터 낸다.
"요년, 방정맞은 년."
욕지거리를 하고 놀이의 손에서 주전자를 뺏어 가지고 제가 손수 따라 먹기 시작한다.
금성은 속으로 오늘 밤에는 주만을 보러 가는데 네까짓 년이 다 무엇이냐 생각하였던 것이다. 하늘 위의 별을 따러 가는 그이거니 발부리에 핀 한 송이 풀꽃이야 돌아볼 나위도 없었던 것이다.
그는 놀이를 안은 채로 주만을 꿈꾸기도 여러 번이었었다. 눈을 지그시 감고 주만의 얼굴을 그리어 놀이의 얼굴과 바꾸어 보기도 하였었다. 이 따위 종년의 살도 이렇게 보드랍고 미끄럽거든! 하고 한숨도 한두 번 쉬지 않았었다. 벼르고 벼르던 오늘 밤에야말로 그를 찾을 것이 아니냐. 이런 때에 놀이 같은 것을 가까이하다니 그것은 주만에 대하여 모독이요 죄송스런 일이었다.
이런 줄이야 까맣게 알 수 없는 놀이는 상전의 태도가 이상하다 하면서도, 굳이굳이 술 먹는 것을 말리려 들었다.
"아이그, 제발 좀 고만 잡수십시오. 너무 취하시면 또 쇤네를……."
하고 놀이는 이번에는 잔을 치워 버리려 하였다.
"요년, 버릇없는 년, 더러운 년!"
금성은 눈을 흡뜨고 소리소리 질렀다.
"누가 네까짓 더러운 년을……."
당장 잡아나 먹을 듯이 흘겨본다. 주만을 보러 가는 데 백배 천배의 용기를 자아내게 하는 술잔을 빼앗다니. 괘씸한 년.
놀이는 대번에 눈물이 펑펑 쏟아질 듯하였다. 아무리 상전이기로 사람의 괄시를 이렇게 한단 말이냐. 사람을 짓주무르고 놀릴 적에는 할 소리, 안 할 소리, 갖은 잡보짓을 다 하고 채신머리없이 굴면서 술 그만 먹으라는 것이 무엇이 그렇게 버릇이 없단 말이냐.
"흥 더러운 년!"
더럽기는 누가 더럽단 말인가. 더러운 짓을 가르치기는 도대체 누가 가르쳤단 말인가.
원통하고 억울한 일은 맡아놓고 당하다시피 하는 처지이지만 이 때처럼 놀이가 분심을 일으킨 적은 없었다. 발딱 일어나서 안으로 들어가 버릴까 하다가 또 무슨 벌을 받을지 몰라서 주저주저하고 있자니까 창 밖에서 고두쇠 소리가 났다.
"안장을 다 지었습니다."
"응, 그래."
하고 금성은 겅정겅정 뛸 듯이 기뻐하며 영창을 연다.
고두쇠는 술상을 보고,
"여쭙기는 황송합니다마는 소인도 목이……."
말끝을 얼버무리고 연방 허리를 굽실굽실한다.
놀이에게는 그렇게 팩하게 성을 내던 금성은 고두쇠를 보고는 얼굴을 편다.
"그래 목이 컬컬하단 말이지. 자, 옜다, 이걸 먹어라." 하고 제가 먹던 주전자를 내어준다.
"네, 황송합니다."
"놀아, 이 상 마저 내어줘라."
'무슨 까닭이 있구나.'
놀이는 상을 내어주면서 생각하였다. 주안상을 하인에게 그대로 내어주는 것은 전무후무한 일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