무영탑 - 028

그 후 여러 번 매파를 보내 보았으나 저편에서는 선선히 승낙도 없고 그렇다고 딱 거절하는 것도 아니요, "아직 미거하니까"라는 말로 뒤를 둘 뿐이요 종시 결말을 짓지 못하고 오늘날까지 미룩미룩 내려온 것이다.
당당한 금시중의 아들이요 당나라의 말이나 글을 조금만 알아도 금쪽같이 쓰이어 먹는 오늘날 자기는 당나라 유학까지 하였겄다, 한림학사란 기가 막힌 벼슬 가자까지 얻었겄다, 어느 모를 어떻게 뜯어 놓고 보더라도 신라 천지를 통틀어 자기만한 신랑감은 없을 것이다.
통혼만 하면 저편에서 감지덕지 곤두박질을 하고 승낙을 할 줄 알았던 것이 이렇게 질질 끌 줄이야 정말 생각 밖이었다.
호사다마란 예로부터 있는 말이니 무슨 병통이 어디서 어떻게 생길는지도 알 수 없는 노릇이다.
이래 될 줄 알았으면 두 차례나 만났을 그때에 아주 당자끼리 아퀴를 지어 버렸던들 차라리 나을 뻔하였다. 거추장스럽게 매파니 통혼이니 할 것도 없이 일은 쉽사리 귀정이 났을는지 모른다.
그렇다면 저번 불국사 거둥에 주만이가 끼일 것을 까맣게 몰랐던 것이 천추의 유한이었다.
만일 주만이가 거기 끼인 줄만 알았더면 세상없어도 쫓아가 보고야 말았을 것이다.
아무리 잡인을 금하고 남자를 금하시는 거둥이라 할지라도 멀리멀리 따라가는 것이야 누가 금할 것이냐. 그 넓은 불국사에 어디 몸을 숨기면 못 숨길 것이냐. 어느 나무 그림자 밑이나 불전 그늘에 몸을 감추었다가 주만이가 탑을 돌 때에 같이 탑을 돌아도 좋을 것이요 달도 밝으니 그 아름다운 얼굴을 실컷 마음껏 바라볼 수도 있을 것이다. 갖은 수작을 주고받을 기회도 있었을 것이다.
아옥의 말마따나 저도 탑돌기를 할 적에는 마음이 달떴을는지도 모르리라.
월색이 의희한데 재자가인이 서로 만나 일창일수는 얼마나 운치 있는 놀이였을까.
'아옥의 말대로 오늘 밤에라도 그를 찾아볼까.'
금성은 문득 이런 생각을 하고 자리에서 벌떡 일어섰다.
이렇게 쉬운 생각을 왜 여태까지 못 하였던고. 지난 일을 탓하고 뉘우칠 것은 조금도 없다. 오늘 밤에라도 그를 찾기만 하면 고만이 아니냐. 오늘 밤 달은 파일날 달보담 더 크고 더 밝을 것이 아니냐.
교교한 월색을 따라 시흥에 겨운 절대의 문장이 절세의 가인을 찾는 것은 옛날에도 흔히 있던 풍류성사가 아니냐. 나는 사마상여의 옛 본을 받아 상사곡을 읊으리라. 저 비록 탁문군이 아닐망정 그만큼 아름답고 풍정 있는 그이거니 오현금 두어 곡조야 어찌 아끼리요.
금성의 방 안을 거니는 발은 점점 활기를 띠어 온다. 그의 팔은 이따금 춤이라도 출 듯이 벌어진다.
자지러지는 제 생각에 미치광이 모양으로 홀로 싱글벙글한다.
주만이 있는 별당문을 두들기기만 하면 주만은 어느 틈에 제 목소리를 알아듣고 맨발로 뛰어나올 것 같다. 자기에게 몸을 던지고 그리움에 주렸던 눈물을 흘릴 것 같다.
홍등을 돋우고 또 돋우고 남남 사이에 밤 가는 줄 모를 것 같다.
그의 공상은 차차 현실성을 띠어 오고 나중엔 자릿자릿한 육감까지 느끼게 되었다.
그의 입에서는 문득 당시(唐詩) 한 구가 구르듯 흘러나왔다.
新情未洽天將曉
更把羅衫問後期
(새 정이 들자마자 어느새 밤이 밝네.
옷소매 부여잡고 언제 또 오시려오.)
이 한 구를 읊고 또 읊다가 나중에는 미친 듯이 껄껄 웃었다.
앉으락누으락, 일어서서 거닐어 보다가, 발랑 나동그라져 보다가, 바작바작 애를 졸이며 간신히 그 낮을 보내고 말았다.
그의 바라고 기다리던 밤이 되었다.
밤이 되어도 얼마를 더 서성거리다가 마침내 영창을 열어젖히고,
"고두쇠야." 하고 크게 불렀다. 고두쇠란 그의 마부의 이름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