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옥이가 들어간 뒤에도 금성은 혼자 안절부절을 못 하였다.
그는 일어나 방 안을 거닐어 보았다. 까닭 없이 발 놓이는 것이 지척지척한다. 다시 책상 앞에 도사리고 앉아 보았다. 치웠던『시전』을 다시 펴들고 소리를 높여 읊조렸다.
아옥이가 흉을 본 대로 역시 '요조숙녀 군자호구'란 대문을 되씹고 곱씹고 하다가 마침내 책을 집어던지고 머리를 흔들어 본다. 밀물처럼 밀려 들어오는 갖은 생각을 떨어 버리려는 것처럼.
그의 눈앞에 먼저 떠오르는 것은 주만이와 처음 만나던 광경이었다.
정월 보름날 그는 달재〔月城〕로 달맞이를 올라갔다. 온 서울 안 사녀들이 한창 구름같이 모여드는 판이었다.
자단과 심향목 수레들이 으늑한 향기를 풍기며 비단줄을 흔들고 사람의 물결을 헤치며 지나간다. 은 안장에 새파란 반딧불처럼 옥충의 등자가 번쩍이며 말탄 공자들도 펀득펀득 보인다.
사르럭사르럭 깁옷 자락이 부드럽고 미끄러운 소리를 낸다. 제글제글 노리개와 구슬줄이 운다.
금성도 성 등성에서 말을 내려 몇몇 친구들과 지껄이며 올라갈 제 그들의 앞에 심향목 수레 하나가 사람에 채이어 머뭇거린다. 수렛채를 곱게 꾸민 계집애 종이 잡고 가는 것을 보면, 대갓집 아씨나 아가씨의 행차가 분명하다.
얼마 가지를 않아 그 수레를 끌던 살찐 황소는 그 기름이 지르를 흐르는 누른 몸뚱어리를 부르르 한번 털고 걸음을 멈춘다. 인제는 더 못 올라가겠다는 뜻인지 모르리라.
짙은 남빛 바탕에 자줏빛 점이 별처럼 발린 앙장이 펄렁 하고 걷어쳐졌다.
그 속에서 나타나는 아름다운 처녀! 날씬한 키와 몸매만 보아도 벌써 뛰어난 미인임을 짐작하겠는데 황금사슬에 꿴 비취옥 귀걸이가 가볍게 흔들리는 사이로 내다보이는 분결 같은 귀밑과 뺨! 뒷모양만 보고도 금성은 이미 반나마 넋을 잃었다.
무례한 짓인 줄 저도 번연히 알건마는 마치 난봉꾼이 화랑 모양으로 슬쩍 옆을 지나치어 서너 걸음 앞을 질러 걷다가 힐끗 돌아다보았다.
먹으로 그은 듯한 진한 눈썹이 초승달 모양을 그리고 그 밑에서 번쩍이는 영채 도는 눈매, 곱고 맑으면서도 활발하게 움직인다. 품위 있는 콧대를 따라 내려오면 연꽃 꽃판 같은 입술이 바시시 웃는 듯하다.
어둑어둑 저물어 가는 황혼을 뚫고 붉은 놀은 환하게 서쪽 하늘에 뻗쳤다.
이 으늑한 빛깔 가운데 그 처녀의 모양은 더욱 뚜렷하게 더욱 선연하게 오늘 밤의 달 모양으로 떠오른 듯하였다.
한 걸음 걷다가 돌아보고 두 걸음 걷다가 돌쳐섰다. 저도 제 태도가 너무 괴란쩍은 것을 깨닫기는 깨달았으나 몇 걸음을 걷지를 않아서 고개는 누가 뒤로 잡아당기는 듯이 돌려지고 또 돌려지고 하였다. 좀이 쏠아서 견딜 수 없는 것을 억지로 참고 이번에는 제법 여러 걸음 걸어가다가 다시 돌쳐서서 돌아보았다. 그러나 그때는 벌써 늦었다. 그 처녀는 어느결엔지 좌정하고 달 뜨는 편을 향하여 돌아앉아 버렸기 때문에 백절치듯 하는 사람 틈바구니 사이로 그 옆모양이 어른어른 보일 뿐이었다.
이윽고 놀도 가뭇없이 스러져 버리고 온 하늘이 텅 빈 듯이 제 임자가 나타나기를 기다리는 것 같더니 마침내 동녘 하늘이 밝아 오며 보름달이 그 둥근 모양을 나타내었다.
사람들은 와 하고 일어섰다.
"어째 달빛이 저렇게 허여스름할까." 어떤 입빠른 친구가 먼저 말을 끄집어낸다.
"대보름달이 희면 큰물이 진다는데!"
"쉬 달님이 들으시오. 처음 뜰 때야 으레 허여스름한 법이오."
"꼭 그런 것도 아니지요. 어떤 때는 아주 새빨갛기도 하니까."
"붉으면 가물이 심하다고 하지만 흰 것이야 그렇게 염려할 것 없소. 조금만 더 기다려 봅시다. 흰 대로 그냥 있지를 않을 테니."
"둥글기는 참 둥글군. 어느 한 모 이지러진 데 없이. 둥글면 풍년이 든다지요."
"보름달 안 둥그런 것 보았습디까."
제각기 아는 척을 하고 떠들썩하는 가운데 금성은 틈을 비집고 슬근슬근 그 처녀 가까이 몸을 빼쳐 들어갔다.
달빛을 받은 그 얼굴이 더욱 어여뻤으나 어딘지 모르게 범하지 못할 위압을 느끼고 감히 더 지싯대지는 못했다.
그 후 또 한번 삼월 삼짇날 꽃놀이터에서 보기는 보았지마는 이때는 벌써 혼인말이 왔다갔다할 때라 금성은 체모를 돌보아 날뛰는 마음을 가까스로 참고 먼빛으로 슬쩍슬쩍 바라보기만 하였을 뿐이었다.



